항목 ID | GC03401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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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雙溪洞口-金昌翕- |
영어의미역 | Entrance of Ssanggyedong |
이칭/별칭 | 「쌍계동 입구에서」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석기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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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22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
성격 | 한시|서정시 |
작가 | 김창흡(金昌翕)[1653~1722] |
[정의]
1708년경 김창흡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쌍계사 입구에서 지은 한시.
[개설]
「쌍계동구(雙溪洞口)」는 『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 권7에 수록되어 있다.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지리산[1,915m] 쌍계사(雙磎寺) 방면을 유람할 적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창흡은 1708년(숙종 34) 2월 3일부터 윤3월 21일까지 한양 집을 출발하여 판교→삼척→청송→밀양→진주→하동→덕산→삼가→거창→합천→성주→울진 등을 거쳐 귀가하는 일정으로 유람하였다.
김창흡이 쌍계사에 있었던 것은 3월 14일과 3월 15일이었고, 이때 「쌍계동구」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하동 일대에서의 김창흡의 유람지는 이외에도 불일암(佛日庵), 칠불사(七佛寺), 삼신동, 신흥사(新興寺) 등으로 나타난다.
김창흡의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한양 출신으로 좌의정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셋째 아들이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1648~1722]과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친형이다. 이단상(李端相)[1628~166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창흡은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전국의 명승을 두루 찾아다니며 산수를 즐겨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경기도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 『삼연집(三淵集)』 등이 있다.
[구성]
두 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편 모두 칠언 절구의 구성법에 따라 지은 한시이다.
[내용]
인향섬진배취미(人向蟾津背翠微)[사람들 섬진나루 향해 신록의 산을 뒤로하고]
석문계출여동귀(石門溪出與同歸)[쌍계사 석문에서 흘러내린 시내 따라 돌아가네]
도화편편다리락(桃花片片多籬落)[복사꽃은 조각조각 울타리에 많이 떨어졌으니]
의유진민주엄비(疑有秦民晝掩扉)[진시황 때 백성들이 낮에도 사립문 닫고 있으리]
초혜조경반몽롱(樵蹊鳥徑半䑃朧)[나무꾼과 새들이 다니는 길 반은 희미하여]
매우촌옹문달공(每遇村翁問達空)[시골 노인 만날 때마다 가는 길을 물어보네]
창망려조한록사(悵望麗朝韓錄事)[고려 시대 한 녹사의 유적 슬프게 바라보니]
부지류적재하봉(不知留迹在何峯)[그 유적 어느 봉우리에 남았는지 모르겠네]
앞의 시는 쌍계사로 향하면서 복사꽃이 울타리에 많이 떨어진 풍경을 보며, 백성들이 진시황(秦始皇)의 학정을 피해 깊이 숨어 살았다는 무릉도원을 떠올리는 심경을 노래하였다. 산에서 나와 나루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묘사함으로써 그와는 정반대로 산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리고 작자가 찾는 곳이 무릉도원임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뒤의 시는 고려 말 지리산에 은거한, 녹사 벼슬을 하던 한유한(韓惟漢)의 발자취를 회상하면서 지은 것이다. 한유한의 유적을 찾으려고 노인에게 물어보지만, 아는 이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특징]
앞의 시는 ‘귀(歸)’와 ‘비(扉)’의 운자를 썼고, 뒤의 시는 ‘공(空)’과 ‘봉(峯)’의 운자를 썼다.
[의의와 평가]
「쌍계동구」는 조선 후기 문인 김창흡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유선시 또는 기행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