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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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花開過鄭一蠹遺墟-李玄逸- |
영어의미역 | Passing through the Vestiging Historic Site of Jeong Ildu in Hwagae by Lee Hyeonil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호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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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04년 |
성격 | 한시|유산시 |
작가 | 이현일(李玄逸)[1627~1704] |
[정의]
조선 후기 유학자 이현일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악양정에서 정여창을 떠올리며 읊은 한시.
[개설]
「화개과정일두유허(花開過鄭一蠹遺墟)」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문집 『갈암집(葛庵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이현일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68살 때인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에 연루되어 함경도 홍원군에 유배되었다. 이어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되었고, 1697년(숙종 23)에는 호남의 광양현으로, 72세 때인 1698년(숙종 24) 3월에는 하동 갈은리로 유배지가 바뀌어 섬진강 가에 옮겨 와 살았다.
「화개과정일두유허」는 그 당시 하동 지역을 유람하다가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유허가 있는 하동의 화개현(花開縣)을 지나며, 정여창의 학덕과 비극적 삶을 회상하며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정여창 유허는 현재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岳陽亭)’을 가리킨다. 정여창은 39세 때인 1488년(성종 19) 섬진강 가에 악양정을 짓고 살았다.
[구성]
칠언 절구의 구성법에 맞게 전개한 한시이다. 기구에서는 정여창이 귀양 갔던 함경도 종산을 찾았던 일을 기술하였고, 승구에서는 종산에 정여창의 한이 지금도 서려 있음을 노래하였다. 전구에서는 남쪽 하동으로 와서 정여창의 유허를 방문한 사실을 말하였고, 결구에서는 하동의 화개현에서 정여창을 그려 보는 일에 대해 읊었다.
[내용]
작세종산무유촉(昨歲鍾山無遺躅)[지난해에 종산에서는 남은 자취를 보지 못하였으니]
백년원한지금류(百年冤恨至今留)[한평생의 억울한 원한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듯하네]
남래우과화개현(南來偶過花開縣)[남쪽으로 내려와서 우연히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상상환첨부진수(想像還添不盡愁)[일두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니 근심을 감출 수 없네]
[의의와 평가]
「화개과정일두유허」는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던 정여창과 마찬가지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성으로 유배되었던 이현일이 다시 정여창의 은거지 하동으로 이배된 뒤에, 정여창의 과거 일과 자신의 현재 일을 생각하면서 그 감상을 읊은 시이다. 정여창이 귀양 갔던 곳에 자신도 귀양을 갔었고, 이어서 정여창의 은거지에 또 귀양을 가는 우연찮은 인연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여창의 일을 회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일을 은근히 걱정하는 내용이다.
자신에 앞서 커다란 화란을 당하였던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고, 정여창이 당하였던 화란을 되짚어 보며, 정여창과 같은 인물이 용납되지 못하는 사회 현실을 걱정하는 모습은 선비의 고민과 우수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