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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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靑年會館 |
영어의미역 | Hadong Young Men's Association Hal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41-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준형 |
준공 시기/일시 | 19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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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6월 15일 |
최초 설립지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41-1 |
성격 | 청년회관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에 있었던 청년 회관.
[개설]
하동청년회관은 일제 강점기 사회 변혁과 민족 독립을 염원하는 하동 지역 청년들이 조직을 결성하여 운동을 전개하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건립 경위]
3·1 정신을 계승하여 민중 계몽, 독립 정신 함양 등의 국민 교양 강좌를 위해 1926년 하동 청년들이 앞장서고 독지가의 출연을 받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41-1번지에 건립하였다. 창립자는 백남일(白南日), 정재완(鄭在涴), 김홍태(金洪泰), 이상원(李翔源), 이보형(李輔衡), 김홍권(金弘權), 이원렬(李源烈), 문영빈(文永彬), 이은우(李恩雨), 이륜식(李倫軾), 김진호(金鎭灝), 하식원(河植源), 조동호(趙東皓), 조만제(趙萬濟), 성락구(成樂九), 박승봉(朴勝奉), 김기완(金淇完), 최용환(崔容煥), 이종란(李鍾蘭), 김응택(金應澤), 유영준(劉英俊), 조동혁(趙東赫), 이정홍(李正洪), 김진두(金珍斗), 김택로(金宅魯), 이원기(李源基), 박종원(朴宗源), 강태진(姜泰晉), 문태규(文泰圭), 김계영(金桂榮), 신용규(辛龍圭), 전영우(全永佑), 정윤기(鄭潤基), 이용태(李容泰), 이양수(李禳秀), 채소정(蔡小丁) 등이었다.
[변천]
1926년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하동 청년 단체의 독립 운동 장소로 여겨 하동읍 공회당으로 사용하겠다며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청년 단체가 강력한 거부 의사와 함께 쌍계사 측에 기부 형식으로 소유권을 넘겼으나 끝내 공회당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 고등공민학교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훼손이 심해 재부하동향우회(在釜河東鄕友會)의 성금으로 보수하고 하동청년회관 관리 위원회가 조직되어 관리를 맡았다. 이후 1989년 6월 15일 하동군의 예산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가 이루어진데 이어 하동문화원 사무실로 활용되어 오고 있다.
[현황]
1989년 개보수 공사와 함께 회관 광장에 기념비를 세웠으며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고장의 정신적 지주로 항일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지방 문화 발전의 핵심으로 그 사명을 다해 왔다. 특히 이 회관을 중심으로 신간회, 근우회의 전국적 독립 운동과 하동청년동맹, 농민회 등의 지방적 조직을 통한 민족 독립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해 왔으며,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안재홍(安在鴻) 선생 등이 내방하여 광복을 위한 외침이 울려 퍼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알려 구국을 위한 초유의 『하동벽보신문』이 발간되어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데 앞장선 유서 깊은 독립 운동의 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