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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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靑年會 |
영어의미역 | Hadong Young Men's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추경화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있었던 청년 단체.
[설립 목적]
하동청년회는 3·1 운동 후 민족 운동의 영향이 전국에 널리 퍼져 도시와 농촌, 사상과 종교, 계층을 떠나 점점 확대되자 하동 지역 청년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배우게 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하동청년회는 1920년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초대 회장은 김익원(金翊源 )이었다. 1921년 4월 10일에 있었던 정기 총회에서 2대 회장으로 조동호가 당선되었다. 1922년 11월 총회에서 3대 성낙구 회장이 당선되었으며 1923년 1월 임시 총회에서는 이보형 회장이 당선되었다. 1926년 1월 혁신 총회를 통해 문태규 회장이 당선되었다. 이 총회에서 내부 혁신과 사업 혁신을 하고 회원 연령을 30세 이하로 제한하였다. 당시 회원은 송재수, 김기완, 김대근 등 60여 명이 있었다. 하동청년회는 1927년 8월 하동청년동맹이 창립되면서 흡수되었으며, 하동청년회와 하동청년동맹에서 사용한 일명 하동청년회관은 1927년 8월 낙성식을 거행하고 『뭇소리』 라는 벽신문을 발행하고 남녀웅변대회와 신구음악회를 개최하고 낙성기념식을 거행했으나 다음날 일경이 쳐들어와 수색, 압수했다. 광복 후 공회당으로 사용되었고, 하동문화원 건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사회단체가 입주해 내부수리를 거치면서 원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화재 신청이 반려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일시 귀국하거나 방학을 이용해 귀국하는 학생들을 초빙해 강연을 열었으며 조선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임시 건물을 임대해 야학을 운영하여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회원 간의 친목과 의사 교환을 위해 월례회를 개최했으며 문화 계발을 목표로 『뭇소리』라는 벽신문을 발간하였다. 또한 국악 공연을 하기도 하였고 죽세공 강습소를 설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21년 8월 7일에는 전라남도 광양청년회와 하동청년회의 친목과 체력 증진을 위해 섬진강 변 섬거보통학교 교정에서 테니스 대회 등 체육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하동청년회를 비롯한 청년 단체는 일제의 식민 정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제거하기보다는 청소년과 일반 주민들에게 애국 계몽을 강조하는 민족 운동으로 성장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청년 운동은 대중 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초기에는 매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