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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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永彬 |
영어음역 | Mun Yeongb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숙향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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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만당 결사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문영빈(文永彬)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의 17세손이며, 직하재(稷下齋) 문헌상(文憲尙)의 6세손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일 합방이 선포되자 독립 기구에 참여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해 임시 정부의 전신인 배달학회(倍達學會)[주석 이시영]에서 총무부장직을 맡아 당시 외교부장이던 여운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자금 조달책으로 귀국하여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가 운영하는 백산상회의 감사역으로 취임하여 국내에서 독립 자금 모금에 힘썼다. 북천면 직전리에 있던 가내 전답도 이때에 당시 한성은행에 담보하여 독립 자금으로 가져가 백산상회에 투자하였다. 백산상회란 독립 자금 조달 상회로, 투자주는 안희제와 김성수(金性洙), 경주의 최준, 안동의 장길상, 하동의 문영빈 등이었다. 전국의 재벌을 상대로 모금하였으니 특히 최준의 집을 찾을 때 복면강도로 가장하여 강도짓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문영빈은 안희제와 함께 지하공작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김성수 등과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는가 하면, 불교계 항일 지도자였던 한용운(韓龍雲)이 활동하는 데 재정 지원을 맡는 등 가산을 오로지 항일 독립운동에 쏟았다. 1920년대 한용운, 김범부, 이기주, 김법린, 최범술 등과 함께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의 다솔사를 거점으로 구국 운동을 하였으니, 이 모임이 만당(卍黨)이다.
『북천면지』에 보면, 1914년 문영빈이 최범술, 조우제, 안명언 등과 만나 지은 송별시가 있다. 손자 여항이 찾아낸 이 시에는 "한숨의 소리로 촉석루에 오르니/ 쓸쓸한 가을만 깊어지고/ 삼장사의 천년 한이/ 긴 남강에 흐르지 않고 흐느끼누나" 라 하여 나라를 잃은 슬픔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