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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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棺-梁氏老人-遺言 |
영어의미역 | Old Man Yang's Request in His Will That 12 Coffins To Be Made |
이칭/별칭 | 「양장골」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
집필자 | 한양하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에서 양씨 노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12개의 관을 만들라는 양씨 노인의 유언」은 하동군 진교면 성평마을의 양장골[梁將谷]에 얽힌 실패한 영웅담이다. 양씨 노인이 나라를 위한 큰일을 하려고 12개의 관을 만들라고 유언을 했으나 후손이 11개밖에 만들지 못하였기에 마지막 관이 파헤쳐져 상처투성이의 동자장군이 때를 얻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비극적 영웅담이고, 그 골짜기를 양장골이라고 했다는 지명유래담이며, 장군이 되면 입고 출정할 갑옷이 들어 있었다는 장롱바위에 대한 암석유래담이다. 이를 「양장골」이라고도 한다.
[채록/수집 상황]
2002년 진교면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진교면지』에 실려 있다. 또한 2004년 하동군 각지에서 채록·수집한 설화 자료를 중심으로 하동향토사연구위원회가 집필하여 2005년 하동문화원에서 발행한 『하동의 구전설화』의 370~373쪽에도 「양장골[梁將谷]」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2개의 관을 만들라는 양씨 노인의 유언」은 진교면 조사위원장 김영언[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706]이 현지에서 채록한 것이다.
[내용]
진교시장에서 북쪽으로 곧게 치달은 길을 따라 월운(月雲)마을로 향하면 약 3㎞ 지점에 성평마을이 있다. 성평마을 동편에 있는 깊은 골짜기를 양장골이라 하는데, 이 골짜기에 구전하여 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아담한 토담집을 짓고 살았다. 팔순을 넘긴 양씨에게는 동갑내기 할멈과 철이 덜 든 두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양 노인이 “애비가 죽거들랑 앞산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되 반드시 관을 12개를 만들어야 한다. 꼭 명심해 두어라. 너희들이 관 12개를 준비한 다음 시신이 들어가지 아니한 11개의 관속에는 팥 한 줌씩을 넣어라. 그리고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맨 밑에 묻고 흙을 한 뼘쯤 덮은 다음 차례로 빈 관을 묻어라. 또 하나 절대로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말며, 애비가 죽은 것도 장례를 마친 다음에 알려라.”라고 하였다.
형제는 남의 눈을 피해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관을 만들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가 일을 서둘렀다. 그러나 쓸 만한 나무는 모두 동이 나고 마지막 관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양 노인은 관 12개를 꼭 만들라는 유언을 거듭하고는 얼마 후에 숨을 거두었다. 형제는 백방으로 주선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하는 수 없이 11개의 관으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형제들은 장성하였고 토담집에도 상서로운 기운이 넘쳐 가운(家運)은 이들을 도왔다. 한편 조정에서는 간신배들의 농간과 작당으로 날로 국운이 쇠퇴하고 세도가들의 부패와 무능으로 민심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장차 나라에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는 요승(妖僧)의 말에 놀란 조정 정승들이 전국의 유명한 지사들을 불러 모아 지맥(地脈)의 기(氣)가 뭉쳐 있는 곳을 찾아내라고 명을 내렸다. 지사들은 방방곡곡을 뒤져 남쪽 땅 양지바른 이곳 양씨 묘를 찾아내게 되었다.
간신들은 서둘러 이곳에 군졸들을 급파하여 엄하게 경계하도록 하고는, 양씨 묘에서 장차 역신(逆臣)이 나올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민심을 수습한 뒤 묘를 파기 시작하였다. 파낸 관 속에는 있어야 할 시신은 없고 다만 팥 한두 줌이 들어 있었다. 이상히 여긴 이들은 창끝으로 찔러 또 하나의 관을 찾아내었다. 열어 보니 먼저 것과 같이 빈 관에 팥만 있었다. 며칠 동안 같은 일을 거듭하여 관 10개를 파낸 군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쉬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관을 파낸 구덩이에 짙은 안개가 서리고 안개 속에서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놀란 군졸들이 창과 곡괭이로 마구 찌르고 휘두르며 11개째의 관을 열었다. 관 속에는 상처투성이가 된 앳된 동자장군이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러서 있던 군졸들이 다시 몰려들어 철퇴로 여러 번 내리쳤다.
채 피어 보지 못한 동자장군은 시의(時宜)를 얻지 못해 울었고, 빈 관 속에 들어 있던 자신의 병졸들이 화신(化身)하지 못했기 때문에 웅지(雄志)를 펴지 못해 울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들이 노부의 유언대로 12개의 관을 모두 만들었더라면 나라를 구하고 태평성대를 누릴 국운(國運)을 맞았을 것을 한동안의 난관을 타개치 못해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양장군의 골짜기에는 양장골의 이름만 남게 되었다. 그 위쪽 산등성이 꾀꼬리재에는 장롱바위가 있다. 이 바위 안에는 장군이 입고 출정할 갑옷이 들어 있다고 하였는데 도굴꾼들이 이 바위를 파괴하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12개의 관을 만들라는 양씨 노인의 유언」의 주요 모티프는 ‘아기장수와 같이 비극적으로 좌절한 영웅’이다. 아기장수 설화는 광포전설로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데 「12개의 관을 만들라는 양씨 노인의 유언」도 같은 맥락의 비극적 영웅담이다.
양씨 노인이 죽으면서 12개의 관을 만들되, 11개의 관에는 팥을 한 줌씩 넣으라고 한다. 이는 아기장수 설화에서 아기장수가 자기가 죽으면 팥과 조와 기장을 한 되씩 넣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팥이나 조, 기장은 백성의 먹을거리이며, 그 먹을거리는 아기장수가 거느릴 군사가 된다. 이는 아기장수가 민중들을 거느릴 영웅이 될 것임을 상징한다. 「12개의 관을 만들라는 양씨 노인의 유언」에서 양씨 노인이 팥을 넣어 달라고 한 것 또한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한 방비로 볼 수 있으며, 팥은 아기장수가 거느릴 군사가 될 것이었다.
양씨 노인은 자식들에게 관을 12개 만들라고 하는데 자식들은 쓸 만한 나무가 동이 나서 마지막 관을 만들지 못하고 결국 11개의 관으로 장례를 치른다. 이는 아기장수가 콩을 세 되 볶아 달라고 했을 때 밖으로 튀어간 콩 한 알을 어머니가 주워 먹어 콩으로 갑옷을 만들었으나 결국 한 알이 부족해 왼쪽 겨드랑이를 가리지 못해 화살을 맞게 되는 것과 같다.
양씨 노인은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말며, 자신이 죽은 것도 장례를 마친 다음에 알리라고 한다. 이러한 금기는 언제나 위반을 낳는데, 아기장수 설화에서도 아기장수는 자신이 묻힌 곳을 알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에 의해 금기는 어겨지고 아기장수가 묻혀 있는 곳을 임금의 군사들이 찾아간다. 양씨의 묘는 가족에 의해 금기가 위반되지 않고 조정 잡배를 거느린 요승(妖僧)에 의해 양씨의 묘가 지맥의 기가 뭉쳐진 곳으로 발각된다. 이는 양씨 노인이 더욱 조정 잡배와 대립되는 인물로 부각되는 화소이다. 아기장수 설화의 경우 아기장수가 가진 비범성에 의해 큰 장수가 될 것임을 알게 되지만 「12개의 관을 만들라는 양씨 노인의 유언」의 경우에는 양씨의 비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져 있고, 그런 조정 잡배가 요승의 꾐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으면서 양씨의 묘를 찾아내 지맥을 끊고자 하는 점에서 요승의 무리들과 맞선 양씨의 비범성이 드러난다.
양씨의 관을 파낸 구덩이에 짙은 안개가 서리고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나서 보니 상처투성이가 된 동자장군이 흐느끼고 있었다. 때를 타고 나지 못한 동자장군은 결국 철퇴를 맞고 죽게 된다. 아기장수 또한 임금이 억새풀로 바위를 가르자 콩과 조와 팥으로 만든 군사들이 일시에 녹아 없어지고 아기장수도 사라지게 된다. 동자장군과 아기장수 모두 비극적 운명을 지닌 영웅 서사의 결말이다.
양장골 위쪽 산등성이의 꾀꼬리재에는 장롱바위가 있는데, 장군이 입고 출정할 갑옷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시대를 평정할 영웅을 간절히 원하던 백성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백성은 끊임없이 영웅의 탄생을 바라고 있기에 아기장수에서는 날개 달린 백마가 나타나 구슬피 울었고, 아기장수가 어딘가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양장골 이야기에서는 동자장군이 죽은 데 대한 안타까움과 동자장군의 흔적으로 양장골 이름의 유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