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8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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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岳陽樓 |
영어의미역 | Akyangnu Pavilion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개치마을[섬진강대로 3087]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정화 |
이전 시기/일시 | 19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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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37년 9월 |
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개치마을 |
성격 | 정자|누정|누각 |
양식 | 팔작 기와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관리자 | 악양루보존위원회[회장 장봉무]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개치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누각.
[개설]
‘악양’은 중국 후베이 성에 있는 한 현(縣)의 명칭으로, 악양루(岳陽樓),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 등 여러 이름난 유적이 있는 곳이다. 중국의 악양루는 북송 때 범중엄(范仲淹)[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를 비롯해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712~770]나 이백(李白)[701~762]의 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경상남도 하동군의 악양은 바로 중국 악양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으며, 지명의 유래에서부터 중국의 악양을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동군 악양면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악양루와 동정호가 있다.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592~667]이 중국의 악양과 같다고 하여 ‘악양’이라 이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하동군 악양의 여러 유적은 우리나라 문인들의 한문학 작품 속에 널리 애용되었으며, 악양루는 그 대표적 명승 중의 하나이다.
[위치]
하동군 하동읍에서 하동포구 80리 벚꽃길을 따라 화개 쪽으로 국도 19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악양삼거리가 나오는데, 악양삼거리쯤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악양면 미점리의 개치마을이 나온다. 악양루는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개치마을 입구의 대로변에 위치한다.
[변천]
악양루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악양루와 관련된 유학자들의 한시가 전하고 있다. 변천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며, 현전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936년 손영인(孫永仁), 이태성(李台成), 박준구(朴準球) 등 하동 지역 인사들에 의해 중건하자는 발의가 있었고, 이어 1937년 9월 악양루의 옛 터인 아미산 아래 언덕에 준공하였다.
이후 누대가 너무 높은 곳에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자, 여론을 따라 1947년 현재 위치인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도로변으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이건한 자리 또한 인가가 멀고 관리할 사람이 없어 유랑배들의 기식처로 이용되었으며, 건물이 파괴될 우려가 많았다. 1969년 다시 이건 논의가 제기되었으나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형태]
2층 누각(樓閣)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겹처마에 막새기와로 덮여 있으며, 연등천장(椽燈天障)을 하고 있다. 지붕의 네 귀퉁이에 용머리 장식을 하였으며, 주심포(柱心包) 기둥으로 되어 있다. 누각을 중심으로 사방에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악양루 현판은 정면과 오른쪽 측면 두 곳에 걸려 있다. 마루는 장마루이다.
[현황]
2011년 현재 악양루의 관리자는 악양루보존위원회[회장 장봉무]로 되어 있다. 악양루에 올라 조망해 보면 섬진강과 악양 들판이 내려다보인다. 전경(前景)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국도 19호선의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차량 이동으로 인한 지반의 흔들림이 심하고 먼지가 많이 쌓여 있다. 게다가 하동군의 관리 소홀로 인해 인근의 쓰레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특히 노숙자의 숙식처로 이용되는 등 방치되어 있다. 게다가 명확한 이정표와 주차할 만한 공간이 없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고 있다.
[의의와 평가]
악양루는 하동 악양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로서, 악양 지역을 지나는 조선조 문인들은 악양루 속에 남겨진 유구한 역사와 유적들을 시로 읊어 내었다. 특히 하동군 악양의 동정호, 한산사(寒山寺) 등과 함께 하동 청학동 유람의 주요 코스로 애용되었던 곳으로, 특별 관리가 필요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