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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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湖池天宜場-4·4獨立萬歲運動 |
영어공식명칭 | April Fourth Independence Movement in Daehoji Cheonui Marketplac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대호지 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 천의 장터에서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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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9년 4월 8일 - 대호지 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 부분적으로 벌어지며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대호지 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 시작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 |
종결 장소 | 대호지 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 종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천의리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주민들이 1919년 4월 4일 천의장터에서 일으킨 독립만세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대호지면 유생 남주원·남상돈·남상락·남계창 등이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한 후, 대호지면 이인정 면장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도로와 가로수 정비’라는 명목으로 대호지면 9개 동리 주민을 동원하여, 4월 4일에 5일장이 열리던 정미면 천의리로 행진하였다. 천의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주민들은 이들을 제지하는 천의 주재소 순사들을 물리쳤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이 결과 수백 명의 주민들이 피체되었고, 총 199명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현재 이와 관련하여 120명에 달하는 독립 유공자가 서훈되었다.
[역사적 배경]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은 당진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진 곳이다. 교통은 해로가 발달하였으나, 육로는 당진시 정미면 천의리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주민들은 천의리에 개설된 5일장을 통해 경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반면, 이곳에는 많은 동족 마을이 형성되었다. 많은 성씨의 입향조들이 이곳을 자손 번영의 길지로 인식하여 정착했고, 종중의 자손을 교육하기 위한 시설을 갖추었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대호지면 도이리에 세거지를 이룬 의령 남씨 충장공파였다. 이들은 충장공 남이흥의 후손들로서 남유 장군과 남이흥 장군을 배향하는 양세 충신 정려인 충장사(忠壯祠)를 세우고 충절 의식을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도호 의숙(桃湖義塾)을 세워서 종중의 후손들에게 상무 정신과 함께, 위정척사의 성리학적 이념을 교육시켰다. 특히 1906년에는 화서학파의 적통인 유진하(兪鎭河)[1846~1906]를 초빙하여 강학을 맡겨 많은 제자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직면하며 남주원·남계창·남상돈·남상락을 비롯한 도호 의숙 유생들은 급거 상경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발발한 3·1 운동을 목격하고 대호지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중 남상락은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 1통을 구해서 귀향하였다. 남상락은 이를 일제 남포등 안에 숨겨 인천항을 출발해 귀향하게 되었다.
[경과]
도호 의숙 유생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우선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을 포함시켰다.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의 행정력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대호지면 송전리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던 천도교 세력과 연합하였다. 대호지면에는 천도교 관련 인물이 많았고, 이들은 자체적으로 만세 운동을 계획할 정도로 항일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제반 경비는 대호지면의 최대 부호였던 도호 의숙 유생인 남주원(南柱元)이 거의 책임졌다.
이들은 만세 시위의 일시를 천의 장날인 1919년 4월 4일[음력 3월 4일]로 정하고, 장소도 정미면 천의리 장터에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천의장은 대호지면 면소재지에서 7㎞ 떨어진 곳으로 4일과 9일에 장이 섰다. 또한 천의장은 인근의 정미면·대호지면·고대면의 주민이 모이는 곳이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만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는 민재봉·강태완·김동운·송재만 등 면사무소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강태완은 대호지면 각 구장에게 ‘도로 수선 병목 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을 작성했고, 송재만은 이를 인쇄하였으며, 강태완은 인쇄한 공문에 면장의 직인을 날인하였다. 송재만은 면내 각 구장을 방문하여 공문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4일에는 도로 수선을 위해, 각 호당 1명씩을 반드시 나오게 하여 면사무소에 집합할 것을 당부하였다. 만세 운동 전날 밤, 도호 의숙 훈장이던 한운석은 애국가를 짓고 면사무소 직원들은 320매의 애국가를 인쇄하였다.
1919년 4월 4일 아침,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던 유생들과 행동 대원, 그리고 도로 보수을 위해 참여한 주민들이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모여들었다. 운집한 주민은 약 500명에 달하였다. 송재만은 30척 죽간에 자신의 옷감으로 만든 태극기를 달아 게양하였고, 대호지면장 이인정은 민중을 향하여 “여러분을 모이게 하였음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조선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천의 시장으로 향하라.”라는 연설을 하였다. 이어 남주원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였고, 한운석에 의해 제작된 애국가가 이대하의 선창으로 제창되었다.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출발한 행렬은 대호지면 장정리와 정미면 승산리를 거쳐 천의리에 이르게 되었다. 주민들은 정미면 천의 시장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900여 명에 이르렀다. 행렬이 천의 시장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시장 광장에 세우자 시장에 모여 있던 장꾼, 인근 주민들, 여타 군중이 합세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시위대는 천의 주재소와 정미면사무소로 이동하며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가 행진 도중 천의 주재소 경찰이 시위대를 제지하고자 하였다. 군중들은 이들을 잡아 대열에 참여시켜 만세를 부르도록 종용하였다. 결국 이들은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도망했고 서산보다 근거리에 있던 당진 경찰서에서는 무장 경관 2명을 천의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탈취하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민들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일본 경관들은 군중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고, 크게 분노한 주민들은 이들에게 돌을 던졌고, 천의 주재소까지 파괴하게 되었다. 치열한 시위는 날이 저물면서 해산되었다.
[결과]
대호지 천의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홍성 수비대가 출동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이들이 대호지면 조금리에 도착한 것은 4월 5일 새벽이었다. 보병 5명과 경찰로 구성된 일제 군경이 천의로 출동한 것은 4월 4일 저녁이었다. 하지만 운산교가 무너져 차량 통행이 어려웠고, 이곳 구장인 이연종(李年鍾)은 복구를 지연시켜 군경의 출동을 늦추었다. 결국 일제 군경이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제 군경은 송봉운(宋逢云)에게 뭇매를 가하고 총격을 가해 사망케 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군경은 수백 명에 달하는 만세운동의 주모자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대호지 만세 항쟁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형벌을 받은 수형인[범죄인]은 모두 199명에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 현장 순국자는 송봉운 1명이지만, 서산경찰서로 연행되어 태형 90도를 즉결처분을 받은 인원이 72명, 대전 지방 검찰청 공주 지청에 이송되거나 명단이 드러난 이가 126명이다. 공주 지청에서 태형 90도 16명, 불기소 처분 및 면소 방면 68명, 옥중 순국 3명, 징역 8월 이상 5년까지 선고받은 분이 39명이다. 현재 대호지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20명이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은 의령 남씨 충장공파가 세운 도호 의숙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며, 대호지면사무소 이인정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구체화하고, 천도교 세력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호지면은 당시 궁벽하고 외진 곳이었지만 주민들은 일제의 억압에 맞서 치밀하면서도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은 독립을 지향하는 당진 지역 주민의 항일 의식이 치열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