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66 |
---|---|
한자 | 再建 達城親睦會 |
이칭/별칭 | 조선국권회복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13년 2월 20일 -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 |
---|---|
해체 시기/일시 | 1919년 6월 - 재건 달성친목회 해체 |
최초 설립지 | 대구 안일암 -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순환로 440[대명동 1480-1] |
성격 | 독립운동 단체 |
[정의]
1913년 1월 15일[음] 대구 지역의 안일암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개설]
달성친목회는 1909년 정운일·최병규·이근우 등이 친목을 도모하고 실업 및 교육의 발전을 목적으로 결성한 계몽운동 단체였다. 달성친목회는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이후 달성친목회 회원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이 1913년 1 월 15일[음] 대구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한 모임을 갖고 국권회복을 위한 결사체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면서 달성친목회는 재건되었다.
[설립 목적]
재건 달성친목회(再建達城親睦會)[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는 단군(檀君)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할 것과 국내외 독립운동을 연결하여 대규모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재건 달성친목회는 대구 안일암에 모여 비밀결사를 결성할 때, 단군의 위패 앞에서 목숨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재건 달성친목회는 본부 격인 중앙총부를 대구에 두고 총령(總領)에는 윤상태, 외교부장에 서상일, 교통부장에 이시영·박영모, 기밀부장에 홍주일, 문서부장에 서병용·이영국, 권유부장에 정순영, 결사대장에 황병기, 마산 지부장에 안확을 각각 선임하였다.
재건 달성친목회는 결성 이후 동지 규합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펼치며 만주나 노령(露領) 등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군대 양성과 무기 구입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5년 정운일·김재열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실패하였고 재건 달성친목회는 1915년 9월 강제해산당하였다.
이후 재건 달성친목회는 태궁상점, 향산상점, 백산상회 등 곡물 혹은 잡화를 수출입하는 무역상을 설립하여 국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락하고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일부는 무력으로 부호들을 위협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벌이다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재건 달성친목회는 만주와 노령에 있는 독립운동가와 연락하기 위하여 윤창기·이시영·박영모·서상일 등을 파견하려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창원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이후 1919년 4월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는 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 또는 파리장서사건]에도 적극 참여하여 독립 청원서의 작성과 번역 및 전달을 전달하는 한편 국내외에도 배포하여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재건 달성친목회는 1919년 6월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36명이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재건 달성친목회는 국내 항일 민족운동이 침체하였던 1910년대에 독립투쟁을 펼치며 항일 민족운동의 역량을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로 연결시켜 주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