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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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烈 |
영어공식명칭 | Kim Jaeyeol |
이칭/별칭 | 백농(栢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5월 20일 - 김재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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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0년 - 김재열 보성전문학교 법과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9월 - 김재열 대구권총사건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4월 26일 - 김재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48년 3월 28일 - 김재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김재열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재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화암리 -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
학교|수학지 | 보성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재건 달성친목회 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재열(金在烈)[1884~1948]은 1884년 5월 20일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호는 백농(栢儂)이다.
[활동 사항]
김재열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다. 6개월 뒤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경신공업야학에 입학하여 2년간 염직과를 다녔다. 1913년 2월 20일 김재열은 서상일(徐相日)·홍주일(洪宙一)·이시영(李始榮)·최병규(崔丙圭) 등의 청년 지식인들과 함께 조선 독립을 목표로 하는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재건 달성친목회는 1915년 9월 일제 당국에 의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혐의로 강제 해산되었다.
재건 달성친목회가 해산된 뒤 김재열은 1915년에는 정운일(鄭雲馹)·최병규·최준명(崔俊明)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5년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대구의 부호 서창규(徐昌圭)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김재열은 중국 만주에 갔다가 1916년 음력 3월 무렵 훗날 거사에 사용할 권총 두 자루를 가지고 귀국하였고, 8월에 정운일·최병규·최준명·이시영·홍주일·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瑀)를 비롯하여 대한광복회 회원이던 권국필(權國弼)·임병하(任炳夏)·서상준(徐相俊)[서우순(徐祐淳)의 아들]과 함께 대구의 부호 서우순의 현금을 탈취할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다.
1916년 9월 4일 정운일·김진우·김진만·최병규·권국필·임병하 등은 서상준의 도움을 받아 서우순이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에서 깬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집사 우도길이 달려오자 정운일 등은 권총을 쏘며 달아났다. 이후 최병규가 남긴 신발이 단서가 되어 김재열을 비롯한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김재열은 1917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재열은 1919년 3·1운동 이후 서상일·이순상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 지원 계획을 경상남북도 일대에 알렸으며, 6월 30일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대구검사국으로부터 구류 처분을 구형받기도 하였다. 김재열은 1948년 3월 2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열의 공적을 기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김재열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백농 김재열 선생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