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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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昌基 |
영어공식명칭 | Yoon Changg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2월 16일 - 윤창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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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3년 1월 - 윤창기 재건 달성친목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3월 15일 - 윤창기 강유원간친회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10월 17일 - 윤창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윤창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문화동 - 대구광역시 중구 문화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재건 달성친목회 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윤창기(尹昌基)[1888~1927]는1888년 2월 1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문화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대구에서 재건 달성친목회 및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 등에 가입하여 항일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윤창기는 14살까지 한문을 익혔다. 1906~1907년경 대구 달성학교 보통학과에서 일본어를 3년 정도 익혔으며, 졸업 후에는 대구어음조합에서 근무하다가어음조합이 폐지되자 대구농공은행에 입사하여 2년 정도 일하였다. 이후 신병으로 사직하고 대구 종로에서 2~3년간 이시영(李始榮)의 포목상을 인계받아 운영하였다.
1913년 1월 중순 윤창기는 요양 차 대구 안일암(安逸庵)에 머무르고 있었다. 1월 15일 윤창기와 같이 달성학교를 다녔던 서병룡과 서상일·윤상태·홍주일·이시영·박영모 등이 안일암을 찾아왔다. 서상일 등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시회(詩會)를 명목으로 모였는데, 모임에서 종이에 쓴 ‘단군태황조 영위’를 놓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참석자들은 회원의 일치단결, 비밀 엄수, 변심 금지 등에 관하여 서약하여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재건 달성친목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윤창기 등은 동지 규합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13년 3월 15일 윤창기는 서병룡·홍주일·오재숙·박연조 등과 함께 강유원간친회를 결성하였다. 강유원간친회는 학술 연구와 지식 개발을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매주 1회 정기모임을 가졌다. 강유원간친회는 재건 달성친목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1915년 9월 재건 달성친목회가 강제 해산된 뒤에는 경상남도 지역까지 연결망을 넓혀 나갔다. 강유원간친회는 1916년 4월 “암암리에 불령선인(不逞鮮人)과 기맥을 통해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일제 경찰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1917년 윤창기는 원산으로 가서 원흥상회의 직원으로 종사하였다. 1918년 11월 원산에 백산상회 지점 설치를 계기로 윤창기는 안희제와 남형우를 만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재건 달성친목회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 또는 파리장서사건] 관련 등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 일로 윤창기는 1919년 6월 30일 기소되어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1920년 3월 22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내란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면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윤창기는 1927년 10월 1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윤창기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