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128 |
---|---|
한자 | 人物 說話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인물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인물 설화는 대부분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인물의 유형에 따라 이인, 영웅, 장수, 명인, 고승, 열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인물 설화는 특정한 지역이나 사물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서 친숙하면서도 널리 이야기되면서 역사적이고 교훈적 의미를 지닌다.
[채록/수집 상황]
대구광역시에서 전승되는 인물 설화는 1990년 대구직할시 중구에서 펴낸 『달구벌의 맥』,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과 2002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Ⅱ, 2009년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 등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광역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지역이기 때문에 다양한 인물 설화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인물 설화들을 통하여서는 대구 지역민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등을 엿볼 수 있다.
대구광역시에 전하여 오는 인물 설화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2002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Ⅱ에 수록되어 있는 김덕령(金德齡) 장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옛날 고령 칠등에 김덕령이라는 힘센 장사가 살았다. 말년에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잡혀갈 때, 칼을 들고 큰 버드나무를 향하여 “내 재주가 아깝다.” 하며 훌쩍 뛰어올라 칼을 뿌리자 버드나무 이파리가 모두 끝만 날아갔다고 한다. 서울에 도착하여 김덕령의 목을 베려고 하여도 벨 수가 없었는데, 김덕령이 ‘만고 충신 김덕령’이라는 비석을 세워 주면 죽겠다고 하였다. 비석을 세웠더니 김덕령의 목이 베어졌다. 그 후에 비석에 새겨진 글을 깎아 내려고 하였지만 글씨가 또렷하게 나타나 김덕령이 충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다음은 두사충(杜師忠)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 출신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1549~1598]과 함께 우리나라를 돕기 위하여 왔다. 두사충의 임무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는데,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임진왜란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때 매부와 함께 다시 원병으로 왔고, 우리나라에 정이 들어 귀국하지 않고 귀화하였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에서는 현재 경상감영(慶尙監營) 공원 자리를 주어 살게 하였는데, 그 후 그 자리에 경상감영이 옮겨 오자 지금의 계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에 두씨가 많이 모여 살게 되었고, 두씨 후손들이 주위에 뽕나무를 심어 일대가 ‘뽕나무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1569~1621]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때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월촌(月村)에 우배선이 살았다. 우배선은 성질이 사나운 말을 길들여 타고 다녔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말을 타고 출전하였다. 우배선의 말이 총명하여 적의 화살이 주인에게 날아오면 무릎을 꿇어 주인을 여러 번 구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배선이 일등공신이 되었지만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우배선이 죽자 우배선의 말이 먹이를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사흘 만에 죽었다. 사람들이 우배선의 말을 의로운 말이라고 여기고 의마총(義馬塚)을 만들어 기렸다.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에는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효자 하광신(夏光臣)의 정려각(旌閭閣)에 얽힌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다. 하광신은 하용(夏榕)의 손자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여러 해 동안 중병을 앓고 있던 노모가 늦겨울에 갑자기 복숭아를 찾았다. 하광신이 복숭아를 구할 방법이 없어 마을 뒷산에 올라가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한탄하고 있는데, 송아지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등에 타라고 하여서 올라탔더니 깊은 산속의 외딴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마침 그 집에서 막 제사를 마쳤는데, 제사상에 복숭아가 있어 한 개만 달라고 간청하여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하광신은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에 나라에서 정문을 내렸으며, 하광신의 자손에게는 부역을 면하여 주도록 하였다.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에는 북구 무태동에 있는 월성최씨(月城崔氏)의 효열각(孝列閣)에 얽힌 전설도 수록되어 있다. 월성최씨는 인천이씨(仁川李氏) 가문 이익상(李翼祥)의 아내로서 시어머니가 병상에 계실 때 자기 젖을 짜서 먹이고,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시어머니의 생명을 구하여 오래 살도록 하였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몸소 염습(殮襲)을 하고, 남편이 죽은 지 3일 만에 남편의 영전에서 순절하였다. 철종(哲宗)[1831~1863] 때 효부이고 열녀인 월성최씨의 지극한 효성과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효열각을 세웠다고 한다.
수성구 만촌동에 살던 효자 두한필(杜漢弼)의 효행에 얽힌 전설도 있다. 옛날 만촌동에 두한필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노모가 병환이 들어 온갖 정성을 다하여도 차도가 없이 점점 더 심하여지기만 하였다. 추운 겨울철에 어머니가 버섯이 먹고 싶다고 하여 눈 속에 버섯을 구하러 길을 나섰다가 지쳐 소나무 밑에 쓰러졌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두한필은 소나무 밑에서 버섯 세 송이를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에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으며, 그 후 8년을 더 살았다. 조정에서 명정각(命旌閣)을 지어 두한필의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