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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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烈閣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88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석배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1년 - 「효열각」 국학자료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Ⅰ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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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효열각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883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월성최씨 |
모티프 유형 | 효행담|열부담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월성최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는 효열각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효열각(孝烈閣)」은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월성최씨(月城崔氏)의 효행과 열행(烈行)을 기리는 효열각(孝烈閣)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효행담이자 열부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효열각」은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효열각은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비각(碑刻)이다. 조선시대 철종(哲宗)[1831~1863] 때 효부(孝婦)이자 열녀인 월성최씨의 지극한 효성과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864년 11월에 세웠다.
월성최씨는 인천이씨(仁川李氏) 가문 이익상(李翼祥)의 부인인데, 시어머니가 병상에 있을 때 자기 젖을 짜서 먹이고, 손가락을 깨물어 시어머니 입에 피를 흘려 넣음으로써 생명을 구하여 오래 살도록 하였다. 남편 이익상이 죽었을 때는 직접 염습(殮襲)을 하였고, 남편이 죽은 지 3일 만에 남편의 영전(靈前)에서 순절하였다.
정각(旌閣)은 조정에서 세웠다. 월성최씨의 행적은 「정각기(旌閣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정각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 박문헌(朴文憲)이 썼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효열각」은 효행담과 열부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