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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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鎭 |
영어공식명칭 | Park Dongji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국악인.
[개설]
박동진(朴東鎭)[1916~2003]은 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릉동에서 아버지 박재천과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줄광대였고, 작은아버지는 또랑광대였다.
박동진은 완창 시대를 열어 고사 직전의 정통 판소리를 되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왕성한 공연을 통하여 대중에게 판소리를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판소리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판소리 및 창극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크며, 창작 판소리 발표와 실창 판소리 복원을 통하여 판소리 창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판소리 공연의 전통 양식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박동진의 「심청가」와 「적벽가」는 중고제(中高制)[충청도 지방에서 발달하였으며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는 창법]의 성격이 강한 소리이다.
[활동 사항]
박동진은 16세 무렵 판소리에 입문한 후 1945년 무렵까지 김창진, 정정렬, 박지홍, 조학진, 유성준 등 당대의 이름난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김천시, 경상북도 경주시, 대구 등지의 권번에서 소리 선생을 하였다.
박동진은 1946년에는 대구광역시의 대동권번에서 박지홍 밑에서 소리 사범을 하였다. 그 후 조향창극단(朝香唱劇團)과 햇님국극단, 국립국악원 등에서 활동하였다. 1950년대에는 햇님국극단 등 주로 여성국극단에서 작곡이나 무대감독을 하였고, 1961년부터 국립국악원에 약 14년 동안 재직하였다. 1968년에 「흥보가」 완창을 비롯하여 1969년에 「춘향가」, 1970년에 「심청가」, 1971년에 「적벽가」와 「수궁가」를 완창함으로써 소위 ‘완창 시대’를 열어 고사 위기에 있던 정통 판소리를 되살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3년에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가 되었고, 활발한 공연을 통하여 판소리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박동진은 1969년 무렵부터 실전 판소리 복원과 성서 판소리와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여 판소리 세계를 넓혔다. 제2대 국립창극단 단장[1975~1979] 재임 시 풍토를 쇄신하였으며, 「대업」, 「광대가」 등 10편의 창극을 무대에 올려 창극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1998년 11월 공주에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을 개관하여 제자를 육성하였다.
박동진은 2003년 7월 8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박동진은 판소리 다섯 바탕은 물론이고, 1970년 「변강쇠타령」과 1972년 「배비장타령」 등을 복원하고, 1969년 「구주 성탄」과 1973년 「충무공 이순신」 등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박동진은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비롯하여 1983년 서울시문화상, 1994년 제4회 동리국악대상, 1996년에 제3회 방일영국악상, 2003년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 7월 9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