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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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 藝術 |
영어공식명칭 | Culture And Art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혜경 |
[정의]
대구광역시에서의 문학, 영상 공연, 전통, 음악 등 예술 및 문화 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활동.
[개설]
문화예술(文化藝術)이란 문학, 영상 공연, 전통, 음악 등 예술 및 문화 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활동을 이른다.
[대구의 문화예술]
대구광역시의 근대 문화예술사는 일제강점기 속에서 항거하여 애국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한 서상돈(徐相敦)[1851~1913], 김광제(金光濟)[1866~1920]가 중심이다.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히 사회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대구 근대 문예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문학계·미술계 등 대구 지역 인맥으로 이어지고 ‘대구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이후 한국 문화를 발양시킨다는 일본의 표면적인 명분을 살리기 위한 일환으로 미술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된다. 그리고 여기서 대구의 대표 서양화가 이인성(李仁星)[1912~1950]이 1929년 입선한다. 일본을 거쳐 서양화가 도입되어 일본 유학을 통하여 서양미술을 익히고 돌아온 대구 1세대 서양화가 이상정(李相定)[1896~1947], 서동진(徐東辰)[1900~1970], 박명조(朴命祚)[1906~1969]는 이인성과 함께 대구 화단을 결성하여 대구 최초의 미술 그룹 영과회(零科會)를 결성한다. 1930년 7월 서동진과 김용준(金瑢俊)[1904~1967]의 주도로 향토회(鄕土會)가 결성되어 1930년 10월 17일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제1회 향토회전이 개최되었다. 제5회 향토회전은 전시 공간을 조양회관에서 대구상품진열관으로 바꾸었고, 참여 작가 수도 크게 늘어났다. 대구 문인화를 대표하는 화가 서병오(徐丙五)[1862~1935], 김진만(金鎭萬)[1876~1933], 서동균(徐東均)[1902~1978] 등 찬조 출품작 등까지 이어져 대규모 미술 축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에 의하여 대구 화단의 형성과 대구 미술계의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향토회는 1935년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1936년에는 대구에서 남조선미술전람회(南朝鮮美術展覽會)가 창립전을 갖고 대구 화단의 재편성을 시도하였다.
대구광역시의 근대 문학 활동은 1937년 4월, 5월에 발간된 동인지 『문원(文園)』에서 출발한다. 그 외 대구에서 발간된 동인지들을 살펴보면 1946년 5월 발행된 『죽순(竹筍)』이 있다. 『죽순』은 6·25전쟁으로 정간되다가 1970년에 복간되어 오늘날까지 이른다. 1952년에는 유치환(柳致環)[1908~1967], 김윤성(金潤成)[1926~2017], 설창수(薛昌洙)[1912~1998], 김춘수(金春洙)[1922~2004], 구상(具常)[1919~2004]을 중심으로 동인지가 발간되었다. 1953년 『신태양(新太陽)』이 6호까지 대구에서 발간되다가 1954년 서울로 옮겨가 근대 문화예술의 확대를 시도하였다. 1955년에는 시와 비평 중심의 동인지와 1957년 대구 아동문학 중심의 동인지가 발간되었다.
대구광역시에서 근대에 발간된 시집 중에는 박목월(朴木月)[1915~1978]이 1946년 6월 15일에 발간한 동시집이 있다. 이후 1946년 『들국화』, 1947년 『규포(葵圃)』, 1948년 『대낮』, 1951년 『상화(尙和)와 고월(古月)』, 1956년 『백의제』, 1959년 『씨 뿌린 사람들』 등 많은 시집이 발간되었다.
이처럼 대구광역시는 많은 시인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920년대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가 있다. 「나의 침실로」, 「이별을 하느니」 등의 낭만적인 작품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통곡」 등 민족 저항적 성격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또 다른 인물인 이장희(李章熙)[1900~1929]는 대구 서성로에서 출생하여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이장희의 대표적인 작품 「봄은 고양이로다」는 한국시의 이미지즘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대구 남산동 출신 백기만(白基萬)[1902~1969]은 문인, 정치가, 향토애호가, 논설가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였으며, 시 17편과 「대구 시민의 노래」 등을 남겼다. 1930년대 대구에서 활동한 시인은 이윤수(李潤守)[1914~1997], 박목월, 윤백(尹伯)[1918~?], 이설주(李雪舟)[1908~2001], 박훈산(朴薰山)[1919~1985], 김동사(金東史)[1919~1995], 신동집(申瞳集)[1924~2003],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1912~1970] 등이 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대구 지역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은 다른 시대에 비하여 미비하였으며, 이러한 문학 활동의 소극적 활동 양상은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대구광역시는 소설의 경우 시문학보다 활동이 저조하여 소설가 현진건(玄鎭健)[1900~1943]을 대표 인물로 내세울 수 있다. 현진건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유년 시절을 보내고 일본과 상하이에서 유학을 하였다. 현진건은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할 당시 손기정(孫基禎)[1912~2002]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장면을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워 구속되었다. 현진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불」, 「무영탑」 등이 있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는 사회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하여 문화예술 활동이 더디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