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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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乙巳士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1545년 왕실 외척인 윤임 일파 대윤이 윤원형 일파 소윤에게 탄압을 받으면서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개설]
조선 중종(中宗) 말기부터 인종(仁宗)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小尹) 간의 세력 다툼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1545년(명종 1)[을사년]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세력이 윤임이 중심인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대윤에 가담한 사림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역사적 배경]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이후 권신 간의 치열한 정권 다툼이 일어났으나, 김안로(金安老)[1481∼1537]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權臣)에서 외척(外戚)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중종의 제1 계비 장경 왕후(章敬王后)[1491∼1515]가 세자[인종]를 낳은 뒤 죽었고,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 계비 문정 왕후(文定王后)[1501∼1565]로 책립되어 경원 대군[명종]을 출산하였다. 이에 문정 왕후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과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 사이에 알력이 심하였다.
[경과]
윤원로의 귀양으로 시작된 대윤파의 반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윤원형은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대윤 세력이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였다. 그 결과 대윤 일파는 역모죄로 몰려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비롯해 계림군(桂林君)·김명윤(金明胤)·이덕응(李德應)·이휘(李輝)·나숙(羅淑)·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곽순(郭珣)·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이 처형되었다.
[결과]
을사사화 이래 몇 년간 100여 명에 달하는 사림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다 1565년 문정 대비가 죽자 소윤 세력이 몰락하고, 신진 사류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청도에 낙향하여 사림 세력을 영도하던 김대유(金大有)는 박하담(朴河淡), 박하징(朴河澄) 형제와 함께 향사당과 사창을 건립하고 강학을 통하여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한편 홍문관 교리와 사간원 사간을 역임한 경재(警齋) 곽순(郭珣)[1502∼1545] 역시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청도로 낙향하여 운문산 아래에 정자를 세우고 은거 생활을 하였으나, 결국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살을 당하였다.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역임한 박호(朴虎)[1512∼1579]는 을사사화를 겪은 후 관직에 물러나 향리인 청도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의 훈도에만 힘썼다.
[의의와 평가]
을사사화 이후 정계는 사림 중심으로 재편되어 유교 정치가 재현되었다. 사화의 영향으로 청도 지역 사림들은 중앙 정계 진출을 단념한 채 고향에 은둔하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 인근 지역의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전파하는 일에 힘을 쏟아 향촌 질서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이런 분위기가 바탕이 되어 임진왜란 당시에도 의병들이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