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1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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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越 嚴氏- 端宗 山所- 理由 |
영어공식명칭 | The Reason Why Yeongwol Eom Chose the Site of Danjong's Tomb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기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5년 2월 6일 - 안복순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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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영월군 - 강원도 영월군 |
채록지 | 대전동 -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
성격 | 설화|인물 유래 |
주요 등장 인물 | 단종|영월 엄씨 |
모티프 유형 | 충군과 절개 |
[정의]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엄씨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영월 엄씨가 단종 산소자리를 쓴 이유」는 영월엄씨(寧越嚴氏)의 선조와 단종(端宗)[1441~1457] 묘소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에서 관련 이야기가 채록되었다는 점에서 광포설화의 양상을 지닌다.
[채록/수집 상황]
「영월 엄씨가 단종 산소자리를 쓴 이유」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작한 한국구비문학대계 웹사이트(http://gubi.aks.ac.kr)에 수록되어 있다. 2015년 2월 6일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으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안복순[여, 73세]에게 채록한 것이다.
[내용]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영월 엄씨였다. 옛날에는 시신을 옮길 때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갔다. 영월 엄씨 역시 단종의 시신을 직접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가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시신을 지고 산에 오르던 중 힘에 부친 엄씨는 쉬어 가려고 지게를 받쳐 놓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일어서려고 하는데 지게 목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이하게 여긴 엄씨는 그만 그 자리에다 단종 산소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전형적 광포설화의 양상으로 발견되는 「영월 엄씨가 단종 산소자리를 쓴 이유」는 엄흥도(嚴興道)와 관련된 일화임이 유력하다. 엄흥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충신이고, 본관은 영월이다. 엄흥도가 강원도 영월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은 세조(世祖)[1417~1468]에 의하여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영월에 유배된 후 시해되었다.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에 의하여 단종이 사사된 것이다.
영월에서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하지만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렀다. 그 후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이후 현종(顯宗)[1641~1674] 때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건의로 엄흥도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英祖)[1694~1776] 때 엄흥도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모티프 분석]
「영월 엄씨가 단종 산소자리를 쓴 이유」의 주요 모티프는 ‘임금을 향한 충성과 절개’로서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이다. 목숨을 걸고 유교적 덕목을 지키는 충신의 이야기를 통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신성한 장소’ 모티프를 담고 있다. 불운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이 묏자리라는 영지(靈地)에 깃들어 있는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