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1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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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端宗- 屍身- 收拾- 寧越 嚴氏- 精誠 |
영어공식명칭 | Yeongwol Eom’s Sincerity in Recovering Danj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남기택 |
[정의]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엄씨의 선조 엄흥도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엄씨의 정성」은 영월엄씨(寧越嚴氏)의 선조인 엄흥도(嚴興道)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에서 관련 이야기가 채록되었다는 점에서 광포설화의 양상을 지닌다.
[채록/수집 상황]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엄씨의 정성」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작한 한국구비문학대계 웹사이트(http://gubi.aks.ac.kr)에 수록되어 있다. 2014년 1월 14일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으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김세진[남, 77세]에게 채록한 것이다.
[내용]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端宗)[1441~1457]은 숙부인 세조(世祖)[1417~1468]에게 죽임을 당하여 동강(東江)에 버려졌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건드는 사람은 삼족을 멸한다고 하였다. 그런 엄포 앞에서 누구도 나서서 시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당시 영월 엄씨는 아주 하층민이었으나 용기 있게 단종의 시신을 거둠으로써 일등 공신이 되었다.
영월 엄씨는 단종의 시신을 업고 가던 중 노루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는 겨울이라 눈이 많이 쌓였는데, 노루가 앉았던 곳만 눈이 녹아 있었다. 엄씨는 바로 그 자리를 파서 단종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그 후 엄씨는 양반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단종이 묻힌 곳이 지금의 장릉(莊陵), 곧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단종의 능이다. 그 이후로 단종의 시신에는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누구든지 손을 대면 부정을 타서 외척이든 친척이든 멸족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엄씨의 정성」에서 말하는 영월 엄씨는 엄흥도이다. 이야기에서는 엄씨를 하층민이라 하였으나 엄흥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충신이다. 엄흥도가 강원도 영월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은 세조에 의하여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영월에 유배된 후 시해되었다.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의하여 단종이 사사된 것이다.
영월에서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엄흥도가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렀다. 그 후에는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후 현종(顯宗)[1641~1674] 때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건의로 엄흥도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英祖)[1694~1776] 때 엄흥도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모티프 분석]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엄씨의 정성」의 주요 모티프는 ‘임금을 향한 충성과 절개’로서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이다. 목숨을 걸고 유교적 덕목을 지키는 충신의 이야기를 통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