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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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等院 |
영어공식명칭 | Yudeung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 고방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정민 |
개정 시기/일시 | 1914년 - 유등원 적상면 방이리로 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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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지역 | 유등원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 고방 마을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에 있던 숙식을 제공하는 편의 시설.
[개설]
원(院)은 공무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교통 요지나 험한 영로(嶺路) 등에 설치되는 역의 보조 시설이었다. 대체로 역과 같은 장소에 원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고 칭하였다. 30리에 하나씩 설치되었으나, 지형에 따라서 평지에서는 멀고 산악 지대에서는 가까웠다. 이러한 원 제도는 고려 시대 승려나 불교 신도들이 요로(要路)에서 가난한 여행자와 병든 사람들에게 숙식과 약품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원은 교통상의 요지만이 아니라 깊은 산속이나 험한 길가에도 설치되었으며, 이는 교통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 외에도 빈민을 구제하는 역할을 위한 것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시대 원은 전국적으로 1,310개가 있었다. 전라도에는 245개가 있었으며, 무주에는 무제원(茂梯院)과 함께 승장원(勝長院), 소이원(召爾院) 3개 외에 유등원(柳等源), 기평원(岐平院)이 행정 구역 개편 등에 따라 폐지되거나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유등원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영조(英祖) 때 편찬된 『무주부 읍지(茂州府邑志)』나 1898년(고종 35)에 편찬된 『적성지(赤城誌)』에 “부(府)에서 남쪽으로 40리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유등원은 조선 시대에는 유가면(柳加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적상면(赤裳面) 방이리(芳梨里)로 편제되었다. 조선 시대 유등원이 위치하던 유가면에는 현재는 적상면 삼유리로 구획되어 있는 상유(上柳)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조선 후기 학행과 덕행을 겸비한 문화 유씨(文化柳氏) 가문이 세거하였다. 2004년에 편찬된 『무주 군지(茂州郡志)』[중]에 의하면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정현(柳廷顯)의 후손들이 사육신(死六臣)과 연루되었다고 하여 귀양살이를 하다 이곳으로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유야면(柳野面)·유리(柳里)·유산(柳山) 등의 지명이 생겼다. 또한 여러 문장재사(文章才士)와 효열(孝烈)이 나왔으며, 조선 말에는 진사(進士)를 배출하여 무주 지방의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문사(文士)나 묵객(墨客), 관리들의 왕래가 잦았다. 이에 이 고을로 가는 중간에 원을 설치하여 이곳을 찾아오는 행인들에게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유등원’의 명칭도 유씨(柳氏)의 유(柳)자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등원은 소이원과 통하여 충청도 금산과 무주를 연결하는 시설이었다.
[의의와 평가]
유등원은 무주군과 충청남도 금산군을 연결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중심 교통로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