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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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召爾院 |
영어공식명칭 | Soi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서면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정민 |
관할 지역 | 소이원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서면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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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에 있던 숙식을 제공하는 편의 시설.
[개설]
원(院)은 공무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교통 요지나 험한 영로(嶺路) 등에 설치되는 역의 보조 시설이었다. 대체로 역과 같은 장소에 원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고 칭하였다. 30리에 하나씩 설치되었으나, 지형에 따라서 평지에서는 멀고 산악 지대에서는 가까웠다. 이러한 원 제도는 고려 시대 승려나 불교 신도들이 요로(要路)에서 가난한 여행자와 병든 사람들에게 숙식과 약품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원은 교통상의 요지만이 아니라 깊은 산속이나 험한 길가에도 설치되었으며, 이는 교통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 외에도 빈민을 구제하는 역할을 위한 것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시대 원은 전국적으로 1,310개가 있었다. 전라도에는 245개가 있었으며, 무주에는 무제원(茂梯院)과 함께 승장원(勝長院), 소이원(召爾院) 3개 외에 유등원(柳等源), 기평원(岐平院)이 행정 구역 개편 등에 따라 폐지되거나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소이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무주현(茂州縣)에서 서쪽으로 14리에 위치하며, 망풍루(望豊樓)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무주부 읍지(茂州府邑志)』나 1898년(고종 35)에 편찬된 『적성지(赤城誌)』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소이원은 지금의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서면 마을에 있었다. 대차리 서쪽 금강 주변이었다. 무주부에서 금산으로 가는 대로와 연결되는 소이진(召爾津) 나루가 있어 그에 따른 편의 시설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망풍루와 같은 명소가 있으며, 서쪽의 기평원(岐平院)을 지나 제원 찰방역(濟原察訪驛)과 금산(錦山)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적상면 삼유리로 가는 길에 유등원(柳等院)과 연결되어 지역의 교통 요충지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소이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소이진이 있던 서면 나루를 중심으로 무주로 귀촌한 예술가들의 재능 기부로 이루어진 연주회를 비롯하여 공원 조성이 계획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의 복지 증진과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소이원은 무주군과 충청남도 금산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의 행차가 잦은 곳으로서, 지역의 중심 교통로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