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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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Hwagae Tranditional Market by Seomjingang River Flowing Local Products and Affection |
이칭/별칭 | 화개장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상덕 |
[개설]
화개장터는 경상도 하동과 전라도 구례를 잇는 재래식 장터이다. 해방 이전 전국 7대 시장의 하나로서, 섬진강 수로를 따라 지리산 일대의 산나물과 약재, 전라도의 쌀과 보리, 남해 연안의 미역, 고등어 등의 해산물이 교역되었다. 현재는 상설시장도 많고, 마트 등 점포가 도처에 널려있어 화개장터가 시장으로서 예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화개장터 자체도 시대변화에 따라 예전의 오일장에서 상설시장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나 물산과 정이 함께 흐르던 불과 한 세대 전 화개장터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 속에 늘 고향으로 남아있다.
[화개장터 옆의 명물, 몽돌과 백사장]
화개장터 옆으로 흐르는 화개동천은 명경같이 맑은 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깨끗한 물로도 유명하지만, 한 세대 이전까지만 해도 상류에서 굴러 내려온 하얀 몽돌이 화개장터 주위를 아름답게 수놓으며 장관 중의 장관을 연출하였다. 장터 다리에서 쌍계사 쪽으로 올려다 볼 때, 요강단지만한 눈부신 하얀 몽돌 바닥은 가히 화개장터의 보배라고 할 수 있었다.
장터 다리를 중심으로 섬진강 쪽 장터 뒤쪽에는 새하얀 모래가 깔려 있었는데, 이 또한 장관이었다. 이 모래사장은 옛날 화개장터가 사라지기 이전까지 수많은 낭만을 만들어 주고 젊음을 발산하게 해 주던 그런 장소였다. 여름밤이면 가설극장이 설치되어 처녀·총각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추석 무렵이면 씨름 대회가 열려 각 고을 장사들이 육중한 몸매와 힘을 과시하곤 하였다. 그리고 평소에는 남몰래 숨죽여 흥얼거리던 노래꾼들이 자신의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콩쿠르가 열리던 곳이 바로 이곳 모래사장이었다.
“향토 문화와 영화 예술을 사랑하시는 화개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밤 화개장터 백사장에서 여러분들을 모시고 자신만만하게 보여 드릴 영화 「이슬 맞은 백일홍」. 저녁 진지 드신 후, 할아버지는 손자 손잡고, 할머니는…….”
당시 영화를 선전하던 리어카 확성기의 멘트는 대충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영화 홍보 리어카가 신작로를 따라 지나가면 어린아이들은 그 마이크에서 나오는 소리가 신기하여 10리도 멀다 않고 따라다녔다. 그렇게 며칠을 따라다니다 보면 그 멘트를 다 외우는 어린이들도 제법 되었다.
그리고 씨름 대회는 요즘 시대처럼 황소를 걸어 놓고 천하장사를 다투는 그런 대규모 씨름 대회는 아니었지만 명성만큼은 대단하였다. 당시 씨름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역대 우승자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 장사들이 늙어 저세상 사람이 되어도 언제까지나 불멸의 주인공처럼 술자리의 안주가 되곤 하였다.
콩쿠르는 화개면민은 물론이고 하동이나 전라도의 구례 사람들도 많이 참여했다. 섬진강 건너 하천리 사람들까지 안마당 드나들 듯 화개장터를 드나들었다. 노래 반주는 주로 아코디언과 기타로 했으며, 사회는 하동이나 구례에서 재담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 맡아서 진행했다.
상품은 주로 자전거·솥·삽·괭이·양푼이 등 생활필수품이 대부분이었고, 입상자 중 순위가 뒤쪽인 사람들에게는 노트 한 권이나 성냥 한 통을 주기도 했다. 때로는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1등을 정해 놓고 했다는 후문이 돌기도 했으며, 이런 이야기가 나돌면 소문에 소문이 더께면서 재미나는 이야깃거리로 1년이 즐거울 수 있었다. 때로는 또 멀리 전라북도 남원 등지에서 온 진짜 실력자가 타지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배제되었다며 주먹다짐이 오가는 일도 있었다.
백사장과 장터 중간 공터는 소나 염소 등이 거래되는 조그마한 가축 시장으로 이용되었는데, 흥정은 주로 백사장으로 내려와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루어졌다. 밭에서 부리기 위한 일소든 아니면 어린 송아지든, 크고 작은 소들이 매매되는 배경 중에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도 참 많았다. 그 중 하나는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1960~1970년대에는 농촌 사람들의 대부분이 참 가난했다. 그러나 당시 그런 사람들도 부지런하기만 하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 그 중에 남의 소를 먹이는 것이 일례 중의 하나였다. 즉, 가난해서 소를 살 여력이 없는 가정에서 돈 있는 부자에게 부탁해 암송아지를 한 마리 사 달라고 한 후, 이 소를 잘 길러서 새끼를 낳게 한 다음 어미 소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 송아지는 자신이 갖는 그런 방법이었다. 그것이 밑천이 되고 출발이 되어서 가정을 일으킨 사람들도 꽤 많았다.
[물건이 만나고, 사람이 만나던 화개장터]
옛날 화개장터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 중에 돈을 가지고 오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 환금(換金)이 가능한 쌀이나 장작, 달걀 등 직접 수확한 농산물과 임산물 등을 가지고 장을 보러 왔다. 공산품은 주로 장터에서 거래가 이루어졌지만, 환금(換金)할 농산물과 임산물 등은 중간 상인들이 신작로 양쪽에 늘어서서 진을 치고 있다가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장꾼들이 하나하나 모여들면 물건을 거의 빼앗다시피 하면서 값을 쳐 주고, 중간에서 그 이익을 챙겼다.
그래서 순박한 시골 아낙이나 물정을 잘 모르는 촌부들은 시장에 도착해서야 너무 싸게 팔았다는 것을 알고 후회도 했지만, 당한 사람들이나 그렇게 해서 물건을 산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것이 다 장사의 이치요 거래의 평범한 질서라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서로가 그리 큰 문제로 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화개장터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을 볼 목적으로 행차를 했지만, 그 중에는 또 그냥 장날을 즐기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왜냐하면 딱히 살 것은 없더라도 막걸리나 한잔 하며 오랜만에 지인이나 친척과 만나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이웃 마을의 길흉사를 들으면서 생활의 단조로움을 해소하고 나름의 쾌락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집안에 혼사를 시킬 자녀가 있으면 서로 사돈을 맺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중매를 서기도 하였다. 그래서 강 건너 전라도의 하천마을과 간전, 구례 처녀들이 화개로 시집을 오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이런 관계 때문에 옛날에는 전라도 사람이니 경상도 사람이니 하는 지역감정이란 게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출가외인이란 관념 때문에, 처녀가 시집가면 친정과는 남처럼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강 건너 친정이 뻔히 보이는데도 ‘시집살이’라는 명분 때문에 7년이나 8년 정도 부모님을 뵈러 친정에 한 번도 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듯 화개장터에서 우연히 사돈끼리 만나 서로 간에 집안 사정이나 식구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이 불과 몇십 년 전 이야기다. 또는 사돈집 식구를 만나지는 못해도 딸이 시집간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딸을 본 듯이 반가웠고, 간접적으로나마 딸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던 때가 이제는 우리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화개장터 엿장수]
옛날 화개장터 엿장수들은 주로 바지게 위에 엿판을 올려놓고 가래엿을 팔았다. 엿장수는 주로 하동과 구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수십 리를 걸어서 화개장터로 엿을 팔러 왔다. 당시 엿장수는 재활용 수거자라고 할 수 있었다. 돈으로 엿을 사 먹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못 쓰는 물건이나 고물로 엿을 바꿔먹는 식이었다.
당시는 물물교환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라 엿장수가 받아 주던 물건은 다양했지만, 그 중에서도 놋쇠그릇·숟가락·호미·괭이·비녀·가락지·윤두·다리미 등과 같은 철재 고물, 냄비·양동이·주전자 등과 같은 양은 제품, 크고 작은 빈 병들과 고무신, 그리고 헌 책이나 신문지 등 종이류가 주종을 이루었다.
장터 엿판 주위는 늘 시끌벅적하기 마련이었다. 바로 엿치기 때문이었다. 사내들은 주막에서 마신 한잔 술에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면 엿판에 모여들어 엿치기를 하곤 했다. 승패에 민감한 오늘날의 내기 게임과는 전혀 다른 참으로 정겨운 모습이었는데, 몇 사람이 각각 엿가락을 하나씩 골라 든 후, 입으로 ‘훗’ 하고 불면서 순간적으로 얼른 부러뜨리면 단면에 구멍이 보인다. 그때 구멍이 큰 쪽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크기가 뚜렷하게 차이나면 게임은 바로 끝난다. 하지만 크기가 애매하면 서로 우기게 되고, 마침내는 엿장수가 심판이 되어 승패를 가려 주게 된다. 분패를 하든 통쾌하게 승리를 하든 주위는 늘 잔치 분위기가 된다. 함께 나눠 먹으면서 그 판을 즐겼고, 그래서 어린 애들은 항상 엿판 주위를 맴돌았다. 이곳 화개장터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술 인심, 담배 인심이 후했던 것처럼 엿 인심 역시도 최고였다.
엿은 당시 효도·봉양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그래서 집에 연로한 어른이 있으면 장터에 다녀온 선물로 엿을 사 가는 일이 많았다. 엿은 주로 헌책 종이를 찢어서 싸주었는데, 날이 덥거나 따뜻한 호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엿에 종이가 묻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노인들은 그 종이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먹곤 하였다.
엿을 바꿔먹을 수 있는 것 중에는 머리카락이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게 길렀는데, 그 머리를 참빗으로 빗게 되면 머리카락이 빠졌다. 그 빠진 머리카락을 버리지 않고 계속 뭉쳐서 모아 두면 이것이 돈이 되었다. 가장 값이 나가는 머리카락은 단발을 하기 위해 한 번에 싹둑 자른 생머리였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이렇게 수거된 머리카락은 수출용 가발을 만드는 데 쓰였다고 했다. 이렇듯 못 쓰는 물건으로도 엿을 바꿔 먹을 수 있던 그 시절에,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엿도 못 바꿔 먹을 놈”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으니, 당시 이곳에서 입에 오르내리던 속담에도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화개장터 장꾼들의 외상 풍경]
상거래에서 외상은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시장은 뜨내기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반드시 현찰 거래가 전제되는 오늘날과는 참으로 딴판이던 때가 있었다. 화개장날이면 어김없이 구례서 달구지를 끌고 내려오던 신발장사, 그릇장사와 같이 떠돌이 장사꾼과 정확히 어느 동네인지도 모르는 안면 있는 사람과는 외상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니, 이는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 아래 사는 거시기 영감님 요즘 왜 장에 안 오요?”
“얼마 전에 안 죽었능가?”
“뭐여? 외상값이 좀 있는디!”
그러저러한 사연으로 외상으로 물건을 주고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장사를 하다가 그만 두면 돈을 회수할 뚜렷한 방법도 많지 않았다.
술은 항상 이유가 있어서 마셨다. 친구를 만났다고 한잔, 소를 팔았다고 한잔, 사돈을 만났다고 한잔, 그리고 외상으로 먹은 술값을 다 갚았다고 또 외상 술 한잔…….
외상은 주막에서도 잘 통했지만, 뱃사공과의 외상 약속도 참 낭만적이었다. 낯모르는 사람이 배에 타면 그때그때 뱃삯을 받았지만, 아는 사람과는 추수한 다음에 곡식으로 뱃삯을 받는 식이었다. 즉, 평소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무한 서비스를 해 주다가, 몇 번을 탔든 관계없이 1년 중 보리타작을 한 후에는 보리로, 나락타작을 한 후에는 나락으로 약정한 양 만큼 곡식으로 받아 계산을 한꺼번에 끝내는 식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 주는 화개장터 옆 나루터 줄배 뱃사공은 그래서 자주 다니는 이쪽저쪽 동네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으며, 1년에 두 차례씩 이곳저곳 동네를 돌면서 수금을 하느라 강을 건너 주는 일보다 더 행복하고 바쁜 일정을 보내기도 하였다.
[섬진강 물난리와 화개장터 진풍경]
섬진강 상류 지역에 댐이 설치되기 이전, 옛날에는 섬진강에 큰물이 지면 여러 가지 진풍경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화개장터는 구례 쪽에서 하동 쪽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화개동천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이 모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큰물이 지면 이곳에서 맑은 물과 흙탕물이 만나게 되고, 또 물이 빙빙 돌면서 위에서 떠내려 온 물건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어서 물 구경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대가 조금 낮았던 화개장터가 침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에서 떠내려 온 물건들 중에는 벌목을 해 놓고 아직 수거하지 못해 변을 당한 원목이나, 수박과 참외 같은 농산물 등은 너무나 흔했고, 어떤 때는 살아 있는 돼지가 떠내려가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초가집의 지붕이 해체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떠내려갈 때도 있었는데, 그 위에 닭이 뱃놀이라도 하듯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집과 가축을 잃은 위쪽 지방 이재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5일장이 서는 화개장날이면 이 고을 저 고을에서 일어났던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뉴스가 되었다가 전설로 남았다. 정확도는 다소 떨어지고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화개장터 장꾼들의 입을 통해 다 함께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낭만의 정보 광장 옛 화개장터. 이렇게 느리기는 하지만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던 화개장터의 모든 시간이 이제는 바람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또 다른 생활의 패턴 속에서 또 다른 삶의 형태가 전개되고 있다. 가진 것이 많지 않고 볼거리도 많지 않았지만 행복 지수만은 최고였던 옛날 화개장터 시대는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