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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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起龍神道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for Jeong Giryong |
이칭/별칭 | 충의공 정기룡장군 신도비,충의정공 신도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19-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연가 |
건립 시기/일시 | 1983년 3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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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19-2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정기룡(鄭起龍)|최인찬(崔寅巑)|하용문(河龍雯)|정직교(鄭直敎)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423㎝[총높이]|249㎝[비신 높이]|86.2㎝[비신 너비]|50.5㎝[비신 두께] |
소유자 | 진양 정씨 문중|경충사유지관리위원회 |
관리자 | 경충사유지관리위원회[회장 정한효]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 있는 정기룡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정기룡(鄭起龍)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무신이다.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초명은 정무수(鄭茂壽)이다. 곤양현[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마을]에서 태어나 1586년(선조 19)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의해 이름을 ‘정기룡(鄭起龍)’으로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적은 병사와 열악한 장비로 적의 대군을 맞아 60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특히 영남 땅을 지켜 왜적의 호남 진출을 막고 명나라 군사를 지휘한 유일한 장군이었다. 전후 논공에서 선무 1등 제5위에 책훈되었으며,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임하였다. 보국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으며,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하동에서 정기룡을 추모하는 일은 1928년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정기룡을 흠모하고자 모충계(慕忠契)를 만들고 1932년 경충사(景忠祠)를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경충사가 철거되고 유품이 압수되는 등 고난을 겪었다. 1966년부터 지역과 후손들은 경충사유지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정기룡의 위패를 다시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1992년 하동군의 지원으로 경충사 일대가 정비되었으며, 2005년 사당 등이 중건되었다.
[건립 경위]
최초의 정기룡 신도비(鄭起龍神道碑)는 1700년(숙종 26)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금흔리에 세워진 바 있으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그러나 경충사유지관리위원회에서는 정기룡의 태생지이자, 위패를 모신 사당인 경충사와 정기룡의 아버지 선영이 위치하는 하동에 신도비를 세우고자 하였다. 원래 신도비는 묘나 사당 앞에 세워 역사적 인물을 기리며, 후손들이 본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시열의 비문이 간략하게 작성되어 있기도 하였다. 이에 경충사유지관리위원회는 정기룡의 나라 사랑 정신을 본받고 충혼을 기리기 위해 후손 및 지방 유림과 협력하여 1983년 경충사 앞에 새로 정기룡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정기룡 신도비는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21-1번지 경충사 앞에 있다. 남해고속도로 진교IC에서 지방도 1002번을 따라 남해대교 방향으로 10분가량 가면 하동군 청소년수련원과 경충사 안내판이 보인다. 길가에 경충사 표지판이 보이고, 그곳에서 경충사 어귀로 진입하면 신도비가 있다.
[형태]
정기룡 신도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형식으로, 귀부에서 이수까지 총 높이는 423㎝이다.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해 주위에 화강석으로 울타리 형식의 둘레돌을 설치하였다. 귀부 아래 초석 규모는 가로 211㎝, 세로 225㎝이고, 초석의 바닥은 가로 161㎝, 세로 179㎝이다. 귀부의 높이는 82㎝ 정도이다. 비신(碑身)은 높이 249㎝, 너비 86.2㎝, 두께 50.5㎝이다. 이수 부분은 높이 92㎝, 너비 109㎝, 두께 75㎝이다. 신도비를 보호하는 둘레돌의 규모는 가로 357㎝, 세로 372㎝, 높이 60㎝이다.
[금석문]
정기룡 신도비의 머리에는 ‘보국숭록대부 행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삼도수군통제사 충의정공 신도비(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三道水軍統制使忠義鄭公神道碑)’라고 되어 있다. 내용은 먼저 정기룡의 가계와 탄생, 성장 과정에 대해 새겼다. 1562년(명종 17) 탄생할 때 상서로운 기운이 집안을 감돌았으며, 자랄 때 누구보다도 영민하고 기상이 드높았음을 이야기하였다.
그 다음에는 무과에 합격하고, 이름을 왕의 명에 의해 ‘무수’에서 ‘기룡’으로 바꾸게 된 일화를 썼다. 즉 합격자 방(榜)을 거는 전날 밤 왕의 꿈에 용이 종각에서 일어나 하늘로 날아오르므로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명하여 알아보게 하니 정무수가 있었다. 왕이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기룡이라 지어 주는 한편, 나라의 간성이 될 명장으로 기대하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정기룡이 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업적을 나열하였다. 임진왜란 때 거창과 금산, 상주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전공으로 상주목사가 된 일, 정유재란 때 고령·성주·합천·초계·의령·경주·울산 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된 일, 이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까지 올랐다가 통영 진중에서 병사한 일 등을 썼다.
이렇게 혁혁한 공이 있었지만 인조반정 때문에 업적이 세상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점, 150년이나 지난 영조 때 상주에 충렬사가 세워졌고, 광복 후 중건되었으며, 다시 하동 고향에 경충사가 지어지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였다. 끝으로 부인과 자녀 및 부하들에 대해 쓰고, 명(銘)을 지어 찬미하였다. 신도비의 글은 삭녕(朔寧) 최인찬(崔寅巑)이 지었고, 진산(晋山) 하용문(河龍雯)이 전자를 썼으며, 오천(烏川) 정직교(鄭直敎)가 글자를 썼다.
[현황]
1983년 건립된 정기룡 신도비는 장군의 태생지와 유년 시절 공부하던 서당 터에 있으며, 이곳에는 정기룡 장군 영정과 위패를 모신 경충사와 아버지의 묘소가 있다. 오른쪽 바로 옆에 2010년 복원한 정기룡 장군 생가 두 동이 있고, 동남쪽 10m 아래에 경충사 관리사가 있다. 경충사 어귀에는 충효관이 있으면, 탐방객의 편의를 위한 주차장이 있다. 신도비 왼쪽에는 금오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있는데, 계곡 서쪽에 하동군 청소년수련원이 있다. 신도비 뒤로 하동군 청소년수련원과 경충사를 이어주는 충의교가 있다.
하동문화원에서 관내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내 고장 유적 답사’를 하면서 경충사와 정기룡 신도비를 찾고 있으며, 금오산을 찾는 등산객과 하동군 청소년수련원에 찾는 탐방객도 방문하고 있다. 또한 매년 지방의 유림과 후손들이 정기룡의 기일[음력 2월 28일]에 맞춰 향사(享祀)를 지냄으로써 장군의 위업과 충효 사상을 되새기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83년 경충사유지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후손과 지역민이 힘을 모아 신도비를 세워 정기룡의 행적을 소상하게 기록하여 그 위업을 기리고 대대손손 전하고자 하였다. 비록 오랜 세월을 간직한 신도비는 아니지만, 장군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비에 새겨 놓아 경충사와 더불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