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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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洛榮 |
영어음역 | Jeong Nakyeong |
이칭/별칭 | 광현(光見),우산(愚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6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현덕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3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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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2월 16일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추모 시기/일시 | 1998년 2월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66 |
묘소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
비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낙영(鄭洛榮)은 1879년(고종 16) 3월 22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66번지에서 태어났다. 인재를 기르는 것이 국권 회복의 첩경이라 생각하여 1909년 4월 19일 현산학교(懸山學校)를 설립하고, 이후 약 8년간 교사·교감·교장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양력 과세와 단발 등 주민 계몽에도 앞장섰다. 또한 충의공(忠毅公) 정기룡(鄭起龍)의 사당인 경충사(景忠祠)를 건립할 때 건립추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3월 정낙영은 이범호(李範鎬)·정재운(鄭在雲)·정희근(鄭禧根) 등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서명하고, 3월 18일 하동읍 장날 운집한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3월 19일에는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운동 군중대회’를 열고 진교면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0일 남해읍 장날에는 노량(露粱)[현 남해대교]을 건너 남해읍까지 진출하여 남해의 동지들과 함께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 주며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날 의거는 남해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남해 의거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하동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검사가 항소하여 5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선고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47년 2월 16일 별세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 있다.
[저술 및 작품]
정낙영·박치화(朴致和)·이범호·황학성 등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가 지금까지 전해져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과 하동군청에 게시되어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천(皇天)이 주시고 신명(神明)이 도우사 세계 평화의 회의가 창개(刱開)됨을 반(伴)하야 민족 자결의 여론(輿論)이 병기(幷起)하는 차(此) 호시운(好時運)이 내(來)하얏도다. 오호(嗚呼)라, 십개(十個) 성상(星霜)을 타(他)의 기반하(羈絆下)에서 인통신음(忍痛呻吟)하던 우리 대한 동포여! 확호(確乎)한 정(精)을 여(勵)하여 신속히 수(手)를 착(着)하라. 시(時)가 내(來)하고 운(運)이 복(復)하얏네. 주저치 말며 관망치 말고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심력(心力)으로 자결단행(自決斷行)합시다. 아(我)의 심기설봉(心機舌鋒)은 타(他)의 장창거포(長鎗巨砲)보다 우승(優勝)하니 일심단체(一心團體)로 광복지(光復地)로 병향(幷向)합시다. 최후의 일인(一人)과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폭동과 난거(亂擧)는 행(行)치 말고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 오희(於戱)라, 대한 광복과 동양 친목과 세계 평화가 금일로부터 실현되얏소. 분기(奮起)하고 맹진(猛進)하라, 우리 반만년 신성한 역사와 삼천리 금수(錦繡)의 강토를 유(有)한 우리 동포여! 단군 개국 사천이백오십이년이월십칠일 박치화(朴致和) 정낙영(鄭洛榮) 정인영(鄭寅永) 이성우(李聲雨) 이범호(李範鎬) 박종원(朴宗源) 이병홍(李炳鴻) 정희근(鄭禧根) 김응탁(金應鐸) 이보순(李輔淳) 황학성(黃學成) 김두순(金斗淳)”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1998년 2월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 정낙영(鄭洛榮)의 공훈을 기리는 정낙영 공적비(鄭洛榮功績碑)가 세워졌으며, 비에는 ‘애국지사 우산선생 진양정공 휘낙영 유적비(愛國志士愚山先生晉陽鄭公諱洛榮遺蹟碑)’라고 쓰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