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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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範鎬 |
영어음역 | Yi Beom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55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현덕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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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몰년 시기/일시 | 1956년 1월 10일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출생지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
묘소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중하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범호(李範鎬)는 1883년(고종 20) 2월 10일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에서 태어난 뒤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555번지로 이주하여 살았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정낙영(鄭洛榮)·정재운(鄭在雲)·정희근(鄭禧根) 등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월 18일 하동읍 장날 운집한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배포하였다. 3월 19일에는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 독립 운동 군중 대회’를 열고 진교면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0일 남해읍 장날에는 노량(露粱)[현 남해대교]을 건너 남해읍까지 진출하여, 남해의 동지들과 함께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 주며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날 흥분한 군중들이 주재소와 관공서를 점거하고 경찰관에게 폭행을 가하려 하자 이범호가 이를 극력 만류하고 경찰관을 앞장세워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또한 사천경찰서에서 나온 경찰과 헌병들이 발포하려던 순간 이범호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나를 체포하라!”고 외치며 이를 막았다.
남해 의거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하동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이범호는,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장 90대를 언도받았다. 그러나 검사가 항소하여 5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선고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56년 1월 10일 작고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범호·박치화(朴致和)·정낙영·황학성 등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가 지금까지 전해져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과 하동군청에 게시되어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천(皇天)이 주시고 신명(神明)이 도우사 세계 평화의 회의가 창개(刱開)됨을 반(伴)하야 민족 자결의 여론(輿論)이 병기(幷起)하는 차(此) 호시운(好時運)이 내(來)하얏도다. 오호(嗚呼)라, 십개(十個) 성상(星霜)을 타(他)의 기반하(羈絆下)에서 인통신음(忍痛呻吟)하던 우리 대한 동포여! 확호(確乎)한 정(精)을 여(勵)하여 신속히 수(手)를 착(着)하라. 시(時)가 내(來)하고 운(運)이 복(復)하얏네. 주저치 말며 관망치 말고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심력(心力)으로 자결단행(自決斷行)합시다. 아(我)의 심기설봉(心機舌鋒)은 타(他)의 장창거포(長鎗巨砲)보다 우승(優勝)하니 일심단체(一心團體)로 광복지(光復地)로 병향(幷向)합시다. 최후의 일인(一人)과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폭동과 난거(亂擧)는 행(行)치 말고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 오희(於戱)라, 대한 광복과 동양 친목과 세계 평화가 금일로부터 실현되얏소. 분기(奮起)하고 맹진(猛進)하라, 우리 반만년 신성한 역사와 삼천리 금수(錦繡)의 강토를 유(有)한 우리 동포여! 단군 개국 사천이백오십이년이월십칠일 박치화(朴致和) 정낙영(鄭洛榮) 정인영(鄭寅永) 이성우(李聲雨) 이범호(李範鎬) 박종원(朴宗源) 이병홍(李炳鴻) 정희근(鄭禧根) 김응탁(金應鐸) 이보순(李輔淳) 황학성(黃學成) 김두순(金斗淳)”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중하쌍에 있었다가 2004년 10월에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