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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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晩山亭 |
영어의미역 | Mansanjeong Pavilion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상쌍마을 36-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정화 |
건립 시기/일시 | 19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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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36-9 |
성격 | 누정|정자 |
양식 | 목조 슬레이트 기와|홑처마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3칸 |
관리자 | 연일 정씨 문중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상쌍마을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정자.
[개설]
만산정(晩山亭)은 쌍계거사(雙溪居士) 정혼기(鄭渾基)가 만년에 장수(藏修)[학문을 할 때 조금도 변함없이 열심히 한다는 의미]하던 곳이다. 정승현(鄭承鉉)이 쓴 「만산정기(晩山亭記)」에 의하면, 정혼기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도 불구하고 50여 년 동안 부모 봉양을 정성껏 하였는데, 후에 모친의 권유로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기슭에 정자를 지어 만년을 지냈다고 한다. 정혼기의 자는 화원(和元)·화언(和彦)·화언(華彦), 호는 만산(晩山),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위치]
하동에서 출발하여 하동~진주 간 국도 2호선을 타고 횡천을 지나 양보·진교 방면 삼거리에서 지방도 1003호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300m 가면 삼거리가 나타나고, 다시 오른쪽으로 1㎞ 정도 더 가면 상쌍마을이 나온다. 만산정은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상쌍마을 한가운데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 끝 산자락에 위치한다.
[변천]
만산정은 정혼기가 만년에 학문을 수양하고 자제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남상수(南相洙)의 「만산정 이건기(晩山亭移建記)」에 의하면, 만산정의 본래 위치는 지금보다 더 마을 가까이에 있었던 듯하다. 정혼기는 생전에 만산정이 오랜 세월에 낡아지고 방도 좁아 증축을 시도하려 하였는데, 미처 시행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정혼기의 후손 정재용(鄭在鎔)이 선대의 뜻을 받들어 옛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3칸의 정자를 짓고 기와를 얹어, 시를 읊고 강학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기와를 걷어 내고 슬레이트를 얹은 모습이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목조 구조의 슬레이트가 덮인 팔작지붕집이다. 양쪽으로 방이 2개 있으며, 중앙이 대청마루이고 양쪽 방엔 툇마루가 있다. 눈썹지붕[벽이나 지붕 끝에 물린 좁은 지붕]과 홑처마로 되어 있다. 오른쪽 측면에는 후대에 쪽마루를 달아내었다. 대문은 맞배지붕의 평대문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툇마루가 달린 방이 있다.
정현복(鄭鉉輻)이 쓴 ‘만산정’ 현판을 중심으로 좌우의 방에 각각 ‘만산정’과 ‘제천재(濟川齋)’ 현판이 걸려 있다. 오른쪽 측면에서 처마를 향해 바라보면, 1941년 12월에 쓴 ‘만산금사(晩山唫社)’라는 현판과 ‘낙호재(樂乎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대청마루에는 하영태(河泳台)[1875~1936]의 「만산정 상량문(晩山亭上樑文)」과 남상수의 「만산정 이건기」, 정승현의 기문이 걸려 있다.
[현황]
2011년 현재 만산정의 관리자는 연일 정씨(迎日鄭氏) 문중으로 되어 있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연일 정씨 문중에서 연중 향사를 지낸다고 하나, 관리 소홀로 인해 마루와 방문이 떨어져 나가고 담장이 무너지는 등 훼손된 곳이 많다.
[의의와 평가]
정혼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하동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이당집(而堂集)』에는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1870~1952]가 1935년 정혼기에게 준 편지가 전한다. 남상수의 「만산정 이건기」에 의하면, 정혼기는 당대에 만산정을 중심으로 시사(詩社)를 결성해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산정은 하동군 양보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당시 문인들의 시회(詩會) 등 학문 및 문학 활동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