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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2178
한자 高瑩中
이칭/별칭 여회(如晦),정안(靖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재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131년연표보기 - 고영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164년 - 고영중 성균시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200년 - 고영중 예부경으로 국자감시 시관 담당
몰년 시기/일시 1208년연표보기 - 고영중 사망
출생지 옥구 - 미상
거주|이주지 옥구 한림동 - 전라북도 군산시 한림동
묘소|단소 장도면 상리 -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상리
성격 고려 문인
성별
본관 제주 고씨 문충 공파
대표 관직 보문각 직학사|국자감 대사성 한림 직학사|감찰 어사|조산대부 예빈경|동궁 시독 학사

[정의]

고려 전기 군산 출신 문인 관료

[개설]

고영중(高瑩中)은 고려 전기 군산 출신의 문인 관료이면서 학자였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보문각 직학사, 국자감 대사성 한림 직학사 등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전장(典章)을 여러 번 맡았다.

[가계]

고영중은 탐라국 마지막 왕인 자견왕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12세기 중엽에 옥구에 최초로 입거(入居)한 제주 고씨 옥구 입향조 고돈겸(高惇謙)이고, 외할아버지는 상서(尙書)를 지낸 박현인(朴玄仁)[본관 밀양] 또는 김호(金浩)[원성 김씨]이고, 전처는 이씨[태자사사(太子司事) 이양서(李陽舒)의 딸]이고, 후처는 평양 송씨[아버지는 시중(侍中) 송성원(宋誠元)]이다.

[활동 사항]

고영중의 본관은 제주이고, 자(字)는 여회(如晦)이며, 시호(諡號)는 정안(靖安)이다. 1131년(인종 9)]에 태어났고, 의종 때에 「국자지공지기(國者至公之器)」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후 보문 각직 학사, 국자감 대사성 한림직 학사, 감찰 어사, 조산대부 예빈경, 동궁 시독 학사를 지냈고, 1202년(신종 5)에 치사(致仕)하였다. 1208년(희종 4) 9월에 사망하였고, 그 달에 하원군 북록에 다비(茶毘)하였다가 이듬해에 송림현 동산 기슭에 예장(禮葬)하였다. 1200년(신종 3)에 예빈경으로서 진사 시험을 주관[시부(詩賦)로 진화 등 22인, 십운시(十韻詩)로 노원규 등 73인과 명경(明經) 7인등을 선발]하였고, 1205년(희종 9)에 정언 이규보, 시중 최충헌 등과 함께 남산정에 모여 시부를 논의하고 송나라의 정사를 평논하였다. 이후 여러 관리들과 함께 치사하고, 기로회를 만들어 산수를 즐기면서 매일 같이 소요하며 얼굴을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게 하니, 당세인들이 그를 지상 선인(地上仙人)이라고 칭하였다. 기미년의 어지러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다섯 번이나 사신으로 갔으나 결코 사욕을 취한 바 없었으니, 청렴하고 검소하며 바른 것만을 공경하여 대각(臺閣)에 명성이 자자하였고, 여기에 문장과 글씨까지 뛰어나 전장을 여러 번 맡았다. 고을에 가난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젊은이들이 있으면,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자기 집에 불러모아 돌보고 가르치니 이런 까닭에 고을에서 공의 덕으로 성공한 자가 매우 많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옥구현 인물 조에 고영중은 ‘의종조등제관지국자사복(毅宗朝登第官至國子司僕)'이라고 수록되어 있으며, 『옥구 군지(沃溝郡誌)』[1924] 사환(仕宦) 조(條)에도 수록되어 있다.

[묘소]

고영중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상리 태봉동에 있는데, 7백여 년 동안 분묘가 실전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후손들이 묘지 지석을 발견한 이후, 분묘를 봉축(封築)하고 제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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