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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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秉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종수 |
출생 시기/일시 | 1836년 8월 24일 - 송병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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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5년 12월 30일 - 송병선 순국 |
추모 시기/일시 | 1917년 - 송병선 삼현묘에 배향 |
출생지 | 송병선 출생지 - 충청남도 회덕 |
묘소|단소 | 송병선 묘소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38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관직|경력 | 서연관|경연관|공조 참판|사헌부 대사헌 |
[정의]
개항기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송병선은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다.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고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송병선은 충청남도 회덕에서 송시열의 9대손으로 태어났다. 여러 대에 걸쳐 가학으로 성립된 성리학의 의리사상을 이어받고, 이를 기반으로 서세동점과 일제 침략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의리 사상에 입각하여 저술된 선조들의 문집을 편찬하여 보급하고, 위정 척사 사상을 정립하여 널리 전파함으로써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에 적극 힘썼다.
1877년부터 1905년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가 넘는 상소를 통해 정부의 개화 정책과 일제의 침략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를 비판하였다. 이를테면 내수의 정비, 강력한 군사력 배양, 외세의 척결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침략을 이겨내려 힘썼다. 그럼에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통해 조약의 파기와 5적 처단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각국에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불법성을 알리고, 외교 관계를 이용하여 조약을 무효화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송병선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우선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를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가 선택한 방법론은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 실천으로 송병선은 1867년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의 강회 활동을 시작으로 기국정(杞菊亭)[1889. 8], 영산의 풍천당(楓川堂)[1893. 4], 금산의 용강 서당(龍江書堂)[1898. 9], 임피의 낙영당(樂英堂)[1901. 4, 고암 서당(考巖書堂)[1905. 3]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고, 서천의 풍옥헌(風玉軒)[1901. 4], 성주의 노강(老江)[1901. 9] 등지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이밖에 영동의 빙옥정(冰玉亭)에서 강론하였고[1891. 4], 그해 7월 무주 구천동에 서벽정(棲碧亭)을 중건하여 매년 봄·가을로 선비들을 모아 강학(講學)하였다. 이러한 명망에 무주 군수 조병유(趙秉瑜)는 인근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송병선에게 강론을 청하기도 하였으며[1897. 4], 경남 거창의 병산서재(屛山書齋)[1901. 9], 경상도 지례의 세심대(洗心臺)[1904. 7] 등지에서도 활발한 강론 활동을 펼쳤다.
특히 전라북도 임피면 낙영당에서의 강회 때에는 화서학파의 거두이자 태인 의병을 이끌었던 최익현(崔益鉉)이 참석하여 송병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고, 이외에 임피 향약[1891. 4], 회덕 향약[1905. 5] 등 향약을 통해 지역 사회의 결집을 주도하였다. 송병선은 1867년 옥천 이지당에서의 강회 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충청 지역은 물론 전라, 경상도 등지에서 유림들과의 접촉을 통해 위정 척사 운동의 여론 확산을 도모하면서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송병선은 고종을 직접 만나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고자 1905년 12월,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일제에 의해 한국 식민지화의 걸림돌로 인식되어 차단되었다. 송병선은 1905년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되자 나라와 도(道)의 수호를 위해 결국 죽음을 선택하여 12월 30일 자결하였다.
송병선이 순국하자 고종 황제는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추서하였고, 1917년에 이관구는 삼현묘(三賢廟)에 최익현·유인석·송병선을 3현으로 배향하였으며, 황현의 『매천야록』, 송상도의 『기려수필』, 조소앙의 『유방집』 등 한말 독립운동가 열전에는 반드시 송병선이 포함되는 등 그의 사상과 항일의 정신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시절을 비춘 밝은 등불이 되었다. 송병선이 순국한 후, 송병선의 제자들은 그의 주검을 고향 회덕이 아닌 전라북도 임피에 모셔다가 장례를 치렀다. 또한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모시고, 송병선의 뜻을 이어 교육 사업을 펼치면서 아름답고 의로운 죽음을 기려왔다.
[학문과 저술]
송병선은 『송자대전수차』, 『벽사설』, 『근사속록』, 『동유연원록』, 『무계만집』, 『동감강목』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을 유지해 온 성리학 사상을 널리 확산시켰고 이를 통해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을 강화하였다.
[묘소]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383-1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