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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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判南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민영 |
출생 시기/일시 | 1912년 - 고판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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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고판남 삼남 정미소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 고판남 합판 제조업 시작 |
활동 시기/일시 | 1968년 - 고판남 염전 사업 시작 |
활동 시기/일시 | 1973년 - 고판남 고려 제지 인수 |
활동 시기/일시 | 1985년 - 고판남 세풍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94년 - 고판남 경영 퇴임 |
활동 시기/일시 | 1968년 - 고판남 철탑 산업 훈장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69년 - 고판남 대통령 표창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98년 - 고판남 사망 |
출생지 | 고판남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
거주|이주지 | 고판남 거주지 - 전라북도 군산시 |
활동지 | 고판남 활동지 - 전라북도 군산시 |
성격 | 기업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세풍그룹 창업주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의 기업가.
[개설]
고판남은 전라북도 군산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기업이자 최초의 제지업체로 꼽히는 한국 합판을 창업하여 세풍 그룹으로 키워낸 기업가이다. 또한 1975년에는 육영 사업에도 힘써 개정 간호 대학과 군산 제일 중·고등학교를 인수해 세대 문화 재단을 설립했다.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군산·옥구 지역]으로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고판남은 1967년부터 1991년까지 24년간 군산 상공 회의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가계]
고판남은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아버지 고채호와 어머니 김여아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고판남은 1941년, 나이 29세 되는 해에 삼남 정미소를 차려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8·15 광복을 맞은 1946년 청구 목재를 사들였고 6·25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으나 전쟁 복구 특수로 곧바로 만회할 수 있었다. 이후 회사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1953년 성냥 공장인 배달 산업을 인수했다.
그러나 1960년대 가발과 함께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던 합판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예상한 고판남은 회사 업종을 합판 제조업[한국 합판]으로 전환한다. 곧이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합판이 수출 특화 산업으로 지정되면서 국내 합판 산업은 연평균 30%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이 같은 한국 합판의 대약진은 1984년 총 수출액 30억불을 돌파하면서 절정기를 맞이할 때까지 초활황 경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한국 합판은 초창기부터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 부서를 운영하여 불에 타지 않는 합판이나 습기에 잘 견디는 합판 등을 꾸준히 개발해 외국 제품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였고 군산 지역의 고용 창출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국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 시기에는 사원만 2천명이 넘었으며, 당시 전북 일원의 젊은이들에게 한국 합판 입사는 꿈이 되었다. 또한, 1968년 민간 기업 단독으로 만경강 하구의 갯벌을 막는 사업을 시작해 5년 만에 제방 길이 5㎞의 간척 사업을 마무리하여 대단위 염전을 일궈냈다.
고판남은 합판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1973년 2월 고려 제지[세대 제지]를 인수한다. 당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과의 경쟁에서 최종 낙찰자로 결정돼 종이 사업과의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85년 합판 산업이 사양화되자 한국 합판과 세대 제지를 합병, 세풍을 설립한다. 한 때 신문 용지 사업에서 2위를 기록하는 등 사세를 확장시켜 세풍 그룹으로 발전시켰다. 그 후에도 영진 주철[후에 우민 주철로 개칭]과 내장산 관광호텔도 인수하였으나 흑자를 내지 못해 그룹 채산성 악화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1990년대 이후 제지 부문을 제외 하고는 별다른 흑자 기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1996년 그룹 활성화의 차원에서 전라북도 지역 민방인 전주 방송을 인수하기도 했으며 F1 그랑프리 유치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IMF 구제 금융 체제 돌입으로 워크아웃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만다. 전주 방송 등은 계열 분리되고 나머지 회사들은 모두 파산 및 워크 아웃 상태로 그룹은 공중 분해되었다.
이에 앞서 고판남은 199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후계 체제로 전환했지만 기업 회생을 보지 못하고 1998년 86세 나이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고판남은 국가와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68년에는 정부로부터 철탑 산업 훈장을 받았고, 1969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