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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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南李商在先生葬儀示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정의]
1927년 이상재(李商在)의 운구를 충청남도 한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라북도 군산 지역 각 사회·청년단체가 펼쳤던 장례 행사.
[개설]
월남 이상재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출신으로, 18세 때에 과거를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후 이장식의 소개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로 인해 1881년(고종 18) 신사 유람단에서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여 개화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1884년(고종 21) 우정국이 설치 후에는 인천국 주사(主事)로 발탁되었다. 박정양이 총리 대신이 된 이후에는 학부 학무 국장과 외국어 학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교육에 전념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YMCA를 통한 청년 계몽, 국내 청년 종교 단체 친목회 조직, 조선 교육 협회(朝鮮教育協會) 창립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4년 9월에는 『조선 일보』 사장에 취임해 언론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1925년 4월에는 전국 7백여 신문 기자들이 참여한 ‘조선 기자 대회’를 개최해 의장을 맡아 일제의 언론 탄압과 식민 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1927년에는 좌·우익 인사들이 결성한 신간회에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상재가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진행되었으며 장의 위원회가 각계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되었다. 1927년 4월 7일 장례 후 운구가 서울에서 군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서울 재동 자택을 떠난 운구는 종로 중앙 기독 청년 회관으로 옮겨져 장례식을 치른 후 1927년 4월 8일 군산역에 도착하였다. 이후 군산 지역 사회 단체와 청년 단체가 중심이 되어 조문을 낭독하였고, 영결식장이 설치된 군산 동해안 불이 매립 광장(不二埋立廣場)에 모셨다.
[역사적 배경]
이상재는 일제 강점기 상황에서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민중 의식을 고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 청년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전국을 돌며 학술 발달의 필요성과 국난 극복의 방안에 대해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군산에서는 1922년 2월 25일 군산 예배당에서 ‘복음의 진리와 청년의 단속’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여 군산 부민을 각성케 하였다. 이후 1925년 9월 8일 개복동 예배당 내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실시하여 참석한 이들에게 실력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상재의 이러한 모습은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서 항일 정신을 잊지 않고,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이상재의 사후에 항일 정신을 기리고 전 민족이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군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장례 행사가 이어졌다.
[경과]
군산부 내 개복동 군산 노동 연맹 회관에서 각 방면의 인사가 참여하여 월남 선생 사회장 군산 장의소를 개복동 70번지에 창립하고, 위원장 조용관(趙容寛)을 중심으로 각 부서를 선정하여 장례를 진행하였다. 군산 예배당의 학생들은 학생대를 조직하여 장의 행렬에 참가하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에서 월남 이상재의 장례가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이상재가 민족의 사표(師表)로서 일제의 폭압 아래에서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상재는 군산을 비롯한 전국의 청년들에게 패기와 긍지를 심어주었고, 진취적인 자세로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 민족 국가를 만들 것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