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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노동연맹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15
한자 群山勞動聯盟會
이칭/별칭 군산노동연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 12월 15일연표보기 - 군산노동연맹회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4년 8월 4일 - 암태도 소작 쟁의 동정금 모집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5년 1월 1일 - 군산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 총회 개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6년 1월 14일 - 군산노동연맹회 강령 선언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6년 12월 3일 - 한송 학당과 광동 의숙 합동 경영 실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8년 3월 16일 - 군산노동연맹회, 군산 노동 공제회와 합병 논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8년 5월 6일 - 군산노동연맹회, 메이데이 기념식 금지 처분
최초 설립지 군산노동연맹회 - 전북 군산부 개복동 1번지 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군산노동연맹회 - 전북 군산부 영정 81번지
성격 노동 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마르크스주의 기반의 노동 단체.

[개설]

조선 노동 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는 군산 지역 사회주의자 조용관(趙容寛), 김영휘(金永輝), 차주상(車周相)이 중심이 되어 사회 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조선 노동 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서 분화된 조선 노동 연맹회와 같이 군산노동연맹회(群山勞動聯盟會)도 마르크스 중심의 사회주의 강령을 바탕으로 직업별로 결성된 노동 조합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설립 목적]

군산노동연맹회는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하는 목적에 설립되었다. 군산노동연맹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강령에 입각하여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첫째, 노력 운동(勞力運動)의 조직적 단결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훈련과 교양 함양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 조선 무산 운동(朝鮮無産運動)의 선구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셋째, 무산 계급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행동으로 노동 쟁의 지원, 교육 사업, 파업 시위 지원의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변천]

조선 노동 공제회 설립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서울 청년 회계와 북성회(北星會) 계열로 대립되어 있었다. 조선 노동 공제회 내부에서는 민족 주의 지식인, 사회 주의 지식인, 노동자 대표들 사이에 주도권을 두고 협동이 깨지고 모순이 도출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 노동 공제회의 해체를 주장한 북성회 중심의 사회 주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1922년 10월 18일 조선 노동 연맹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지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1923년 12월 15일 군산 지역에 군산노동연맹회가 설립되었다. 서울의 조선 노동 연맹회가 1924년 4월 18일 조선 노농 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설립 이후 해체의 길을 걸었으나, 군산노동연맹회는 1928년까지 활동한 모습이 확인된다.

군산노동연맹회군산 노동 공제회에서 활동하던 조용관, 차주상 등의 인물이 참가하여, 군산 노동 공제회를 대신하여 군산 지역의 노동 운동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직업별 노동 조합의 성격을 가진 단체를 중심으로 세포 단체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와 전북 민운 사건(全北民運事件)에 조용관, 김영휘 등이 연관되어 투옥되어 세력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1928년 3월 16일에는 군산노동연맹회군산 노동 공제회가 군산 합동 노동 조합으로 합병하자는 의견이 결정되기도 하였으나 합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군산노동연맹회는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군산 지역의 노동 운동 전개 및 지원과 교육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노동자의 자유와 복리 증진을 위한 임금과 노동 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 전개와 파업 투쟁 지원을 하였다. 사회주의 노동 운동의 확산을 위해 암태도 소작 쟁의에 지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진행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는 최초로 권번(券番)에 대해 노동 운동 단체로 인정을 하여, 1926년 1월 12일에 군산노동연맹회에 군산 권번(群山券番) 가입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군산 지역 무산 계급의 교육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한송 학당(韓松學堂)과 광동 의숙(光東義塾)이 경영상의 어려움에 처하자 두 단체를 합동하여 경영하기도 하였다.

[현황]

군산노동연맹회는 서무국, 경리국, 서기국으로 조직 체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설립 당시 임원회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1925년 제 2차 정기 총회를 통해 회장 조용관, 부회장 차주상, 총무 이석규(李石珪), 평의장 김영휘(金永輝), 부평의장 방한회(方漢廻), 평의원 채성학(蔡聖學) 외 7인의 규모로 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1926년 4월 18일에는 임원회를 개편하여 회장 이회직(李會稙), 부회장 백운학(白雲鶴), 총무 김여장(金汝章), 평의장 최동길(崔東吉), 부평의장 정규태(丁奎泰), 평의원 전두일(全斗日) 외 20인으로 임원회를 쇄신하였다. 세포 단체로 군산 지역의 노동 운동 단체인 군산 철도 노동회(群山鐵道勞働會), 군산대 공조합(群山大工組合), 군산 미선 조합(群山米選組合), 군산 권번(群山券番)의 세포 단체를 가지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군산노동연맹회는 일제의 감시와 비슷한 계열의 군산 노동 공제회와 통일적 단체를 이루는데 실패하여 세력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군산 지역 노동 운동 활성화에서 일정 성과를 이루었다. 또한 군산 노동 공제회 보다 발전된 형태의 직업별·산업별 노동 조합의 조직 형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노동 운동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노동 단체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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