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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에 비친 군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31
한자 萬人譜-群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태웅

[개설]

전라북도 군산시는 시인 고은(高銀)이 출생하고 성장한 고향이어서 그의 작품 곳곳에서 군산과 군산의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그의 대형 연작 시집인 『만인보』에 등장하는 5600여 명의 인물 중에서 과거 군산에 살았던 인물 군상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는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근대 군산의 역사와 여기서 살았던 군산 주민들의 삶을 형상화화고 있다. 이는 근대 한국인의 삶 자체였다.

[고은과 군산]

고은(高銀)은 1933년 8월 1일[음력 6월 10일]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마을[현재 전라북도 군산시 미룡동 산 138-1]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고은태(高銀泰)이다. 성장기에 매우 병약하였으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이 때 아버지의 친구로 새터 마을에 살았던 이통년(李通年)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여기서 ‘대길’이라는 머슴을 만났다. 고은은 그에게서 한글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소장하고 있었던 각종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문학을 접하였다. 일제 치하 한글 강습이 엄격히 금지되던 시절에 고은이 한글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대길이의 한글 사랑 덕분이었다. 특히 그는 바다를 같이 보면서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라고 하여 어린 고은이 가난하지만 남과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도록 하였다. 훗날 고은『만인보』에서 그를 어린 아이가 세상에 눈을 뜨게 한 스승으로 묘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는 고은이 태어나고 자란 군산이 그의 정신적인 고향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군산은 그에게 정겹고 따뜻한 고향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미룡 초등학교 시절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남들과 다른 대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천황’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가 ‘천황 폐하를 모독’했다는 죄로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담임 선생님과 아버지의 간청으로 퇴학은 면했지만 3개월 동안 힘든 노역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가 한글을 이미 깨친 덕분에 4학년으로 월반한 뒤 새로 부임한 교장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알고 교장을 몰아내기 위한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후일 그가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군산 사범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특히 고은6·25 전쟁 와중에 그에게 문학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행을 미쳤던 외삼촌이 부역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뿐더러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각각 좌익과 우익으로부터 학살당하는 참상을 목도했다.

이 때 국민 학교 시절의 친구인 조분희도 좌익에 가담하여 여맹 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우익에게 처형당하였다. 그가 이런 참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출가였다. 금강사(錦江寺)[현 동국사(東国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나 곧이어 효봉 선사를 찾아 경상남도 통영 미륵도로 옮겼다. 그의 군산 생활도 여기서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가 육체적으로는 군산을 떠났을지언정 그의 내면에는 늘 군산에 머물렀다. 『만인보』에 나오는 군산의 인물 군상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삶의 참상과 문명의 유혹]

『만인보』에 비친 군산은 특정 시기에 국한된 게 한국 근현대 군산의 역사가 함축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다. 그 중 수탈과 문명화가 공존하는 군산의 모습이 첫 모습을 장식하고 있다. 그가 1933년에 군산에 태어난 까닭에 채만식과 달리 어린 눈으로 군산의 풍경을 보았지만 그것은 정녕 군산의 참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웃에 살았던 민중들의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군산에는 흥남동 개복동 신흥동

오룡동 명산동에

그 언덕바지 따라

일본 사람들한테 밀려난 가난뱅이들

올라가 이룬 산동네

식민지 달동네

초가집 빼곡이 덮인 언덕 동네 있다[「신흥동 껄렁패」]

이런 이야기는 고은 자신이 목격하거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이웃 주민들이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고은에게 전하면서 남겨진 이야기들로 조선인의 눈에 군산의 삶이 어떻게 비쳤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군산은 일제 강점기에 미곡의 비약적인 이출에도 불구하고 그 이익은 일본인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삶은 오히려 팍팍하여 드디어는 일본인들에게 밀려 산으로 올라가 토막집에서 거주하였다. 그런데 이는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인구에 비례한 토막집의 비율이 전국에서 제일 높은 지역이 군산이었다. 그리고 대표적인 동네는 흥남동, 개복동, 신흥동, 오룡동, 명산동이었다.

이러한 궁핍상은 도시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군산 부근의 농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어느 일본인 농장에서 노동하는 소작인과 그의 아낙네를 보자.

선제리 일본농장 별채에 들어 사는

권달수 마누라

왜놈 주인이 부르면

조또

소리나자마자

하이하이하이 하고 달려가는

아낙네

여름밤 참외 한 도막 베어먹는 맛이구나

하이하이 하고 달려가는

아낙네

[중략]

별채 비워주고 떠나야 했다

다른 농장 찾아 떠나야 했다

내 나라

내 집 없는 사람의 아낙네

하이하이 아낙네

치맛자락 하나 단정히 지켜낼 길 없음이여[「하이하이 아낙네」]

경제적 수탈은 조선인 일반의 차별로 반영되었고 다시 이것은 식민지 여성이 감내해야 할 성(性)의 왜곡으로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전시 동원 체제(戦時動員体制) 속에서 조선 여성의 삶을 공식적으로 욕망의 대상으로 포획하기 시작하였다. ‘쌀의 군산’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 말기 아주가리 열매 따다 바치다가

머리에 히노마루 띠 매고

정신대 되어 떠났다[「만순이」]

종군 위안부로 대표되는 식민지 여성의 강제 연행이 신천지와 문명으로 상징되는 군산에서도 가차 없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물론 시인 고은은 활동사진으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이 봉건적 가부장제 잔재가 남아 있던 틈새를 노려 식민지 여성을 유혹하는 모습을 잊지 않는다.

어여쁜 낭자 지어

분냄새에 대낮에 모기 운다

바깥 방앗간 영감과 15년 차이라

저 혼자 나선 길에

군산 희소관 가서

일본 활동사진 보고 오는 길[「나운리 방앗간집 마누라」]

활동사진은 식민지 여성을 유혹하여 그의 욕망을 풀어주는 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는 군산에서 극히 일부인 부유한 조선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채만식의 말대로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살아야 했다.

[좌익·우익의 투쟁과 비극의 근현대사]

일제하 군산 주민의 삶은 해방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비록 해방으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민족적 차별과 수탈이 사라졌지만 이들 사이에 이념을 둘러싸고 반목하고 심지어 상호 죽이는 일에 이르렀다. 고은은 이제까지 남북 분단과 체제 경쟁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했던 집단 기억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시인 고은『만인보』를 통해 재현하려 했던 기억은 망각의 굴레로 들어갔던 군산의 또 다른 기억을 재생하는 원천이다.

우선 그는 좌익·우익 대립과 갈등을 역사적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군산의 어느 마을을 통해 그 비극을 재현하면서 그 연원을 1894년(고종 31) 농민 운동에서 찾았다. 바로 계급의 첨예한 대립이 한 마을에서 살육으로 폭발하였던 곳이다.

우리 동네 용둔마을 꼭꼭 숨은 두메마을

하늘에서나 보아야 보이는 마을

이런 마을에

큰 재앙이 두 번

한번은 증조할아버지 때

갑오년 난리로

이 마을 장정들

전주감영까지 잡혀가 죽었던 일

기웅이 고조할아버지 거기 가 맞아죽고

[중략]

한번은 아버지 때

육이오 난리로

우익 경찰이 보도연맹 잡아다 죽였던 일

좌익이 우익을 잡아죽였던 일

구이팔 직후

우익이 좌익을 잡아죽였던 일

어린 내 몸에서

송장 파내고

송장 냄새 열흘 가도 보름 가도

지워지지 않던 일

미제 뒷산

우리 동네 할미산

아이 밴 아낙네 송장

허파 튀어나온 송장

[하략][「달밤」]

고은은 여기서 자기 마을에 살았던 장정들을 통해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군의 삶을 추적하는 한편 해방 이후 좌우익의 상호 학살을 극적으로 형상화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나타나는 계급 갈등의 참상을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그것은 두 개의 재앙으로 양반과 농민의 싸움,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싸움이었다. 특히 6·25 전쟁은 더욱 심하여 피비린내 나는 학살 그 자체였다.

그러면 고은은 이러한 전쟁의 가까운 뿌리를 어디서 찾고 있는가. 여기서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복원하고 있다.

해방 뒤 학도대 자치대 지나서

미 군정 경찰이 들어왔더니

우리 마을에도 지서장 나으리 나타났다

마을사람 뱌슬거리는 것

강제로 모아놓고

이렇고 저렇고

한바탕 훈시를 늘어놓았다

[중략]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해야

어쩌고 저쩍고 늘어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사람대로

속으로는

벌써 반나절 일하면

저만치나 풀 맬 수 있는데

하고 딴 생각하며 있다가

일장연설 끝나기가 무섭게 흩어졌다

지서장 화났다

저런 것들

저런 한심한 것들

그 지서장이 누구냐 하면

회현지서에서

일본 순사보로

갖은 악행 비행 저지른 자라 한다

해방 되자마자

숨어 있다 나왔다

이제 그에게도 권세가 주어졌다[「지서장 김충호」]

일제 강점기에 순사보를 지냈던 친일파가 어떻게 독립 정부의 지서장으로 변신하였는가를 증언하면서 좌익과 우익의 갈등 원인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데서 찾고 있다. 또한 고은은 자신이 다녔던 군산 중학교의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졌던 어느 학생의 활동을 망각의 늪에서 끌어내고 있다.

남한단독정부 수립 반대

1948년 남조선 단독정부 결사반대 선언할 때

그 단정반대 동맹휴학 선언할 때

군산중학교 1학년부터 6학년 전교생

조회 직전 정렬한 뒤

교감 최익현보다 먼저 뛰쳐나온

서재열[「서재열」]

공식 기록에서는 좌익 학생들이 일부 문제 학생들로 언급되었을 뿐 전혀 그 내막을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사적 기억의 형태로나마 또 하나의 기억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학살의 광경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우선 고은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6·25 때 새파란 인민군 들어와

판섭이 오촌이 마을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중략]

9·28 수복으로 도망갔다가

서수면에선가

익산 오산에선가 잡혀와

할미산 굴 속으로 끌려가 총맞아 죽엇다

       [하략][「판섭이 오촌」]

나아가 6·25 전쟁이 한 여성의 삶을 어떻게 파산시켰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은은 이를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미제 용둔 원당에서

제일 아름답던 똑똑한 영자

열 살 때부터 출무성하여

처녀였던 영자

원당리에서 독점 나운리 산길 넘어가면

잔솔밭 새들도 찍소리 없고

지나가던 사람들 얼결에 걸음 멈추고

그 자리 서서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듣고 가는 영자

인민군 들어와

반강제로 여맹 간부 노릇 하며

찢어진 치마 입고 다니고

여맹 간부 노릇한 죄목으로

이 사내

저 사내

치안대한테 욕보고 나서

혓바닥 깨물고 죽어버릴 줄이야

[하략][「임영자」]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는 흔한 이름의 영자라는 여성은 원치 않았건만 역사의 수레바퀴에 밀려 여맹 간부를 맡게 되었고 드디어 좌익으로 몰려 처참하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고은은 이처럼 분단체제의 모순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망각의 늪에 빠졌던 군산 주민들의 사적 기억을 되살리면서 군산의 역사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고은의 이러한 형상화 작업은 공식적 역사에 갇혀버린 일반 민인의 사적 기억을 역사화 하는 동시에 특정 지역의 정체성이 대다수 사람들의 기억에 기반을 두어 복원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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