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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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鎭-群山倉-國家-軍糧-湖南-依支-湖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종수 |
[정의]
조선 시대 군산 지역에 설치한 세곡 창고 및 관리 관청
[군산진]
군산진은 원래 군산도[오늘날의 선유도]에 있었다. 1123년(인종 원년)에 송나라 사신으로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선화 봉사 고려 도경(宣和奉使高麗図経)』이라는 책을 써서 군산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선화 봉사 고려 도경(宣和奉使高麗図経)』에서 서긍은 군산도에서 군사들로 무장한 6척의 배를 보내 송나라 사신들을 호위하게 하고, 또 섬에는 100명의 군사들이 깃발을 들고 도열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 시대에 군산도에는 군사들의 주둔 시설인 군산진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4세기에 들어와 군산도는 왜구의 극심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왜구는 13세기 초부터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약탈 행위를 자행하였는데, 14세기에 들어와 왜구의 침입은 더욱 빈번해지고 규모도 커졌다. 특히 1380년(우왕 6) 8월 왜구들은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임피에 있는 진성창(鎮城倉)을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로 침입해 왔는데, 왜구의 수는 무려 10,000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왜구의 대함대를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함대가 함포 사격을 통해 궤멸시켰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진포대첩이다.
진포 대첩으로 왜구는 격퇴되었으나 이들이 진포에 들어올 때 그 길목에 있던 군산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들은 지나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여 그들이 한번 지나가면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다고 할 만큼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진포 대첩으로 격퇴당하기 직전에 500척에 달하는 왜구의 대선단이 지나간 군산도에는 아무 것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있던 수군 시설과 민가들은 모두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을 『대동 지지(大東地志)』 고군산도진(古群山島鎮)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래 군산진은 해랑적(海狼賊)들의 침략을 받아 옥구현 북쪽 해변으로 옮겨갔는데, 인조 2년에 옛 진에 별장을 두어 고군산진이라 칭하였다.’
여기서 해랑적은 ‘바다의 이리떼와 같은 도적’이라는 의미로 왜구를 지칭하는 말로 보인다. 이를 통해 군산도에 있던 진은 고려 말 진포대첩 이후 폐쇄되고, 군산진은 옥구현 북쪽 해변[지금의 군산진]으로 옮겨갔으며, 이후 1624년(인조 2)에 군산도에 고군산진이 다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말 조선 초기에 옥구에 설치된 군산진에는 전라도 수군처치사(水軍処置使)가 상주하는 수영(水営)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408년(태종 8) 12월 정유일에 전라도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가 국왕에게 건의한 다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옥구(沃溝)의 수영(水営)은 해로(海路)의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수(鎮戍)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바라옵건대, 수영을 모두 옥구진(沃溝鎮)에 붙이고, 해도(海島)의 중앙인 무안현(務安県)의 대굴포(大崛浦)로 수영을 옮기소서.’
옥구의 수영을 옥구진에 합치고 수영을 무안현의 대굴포로 옮기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시기에 옥구에는 군산진 이외에도 수영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건의로 옥구의 수영은 폐지되고, 수영이 사용하던 관청 건물들은 군산진으로 통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군산진은 서해의 해방(海防) 업무를 전담하였다.
1426년(세종 8) 4월 정묘일에 병조에서
‘군산(群山) 부만호(副万戸) 조마(趙磨) 등은 봉화(烽火)로 바다를 망보는 것을 잘 단속하지 못하여, 적이 와도 즉시 쫓아가서 잡지 못하고 오히려 관내(管内)의 사람들을 살해당하게 하였으니 … 공문을 보내어 추핵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국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이로써 군산진은 4품인 부만호가 거느리는 수군진으로서 해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군산진에 대하여 『세종 실록 지리지(世宗實録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군산(群山)이 옥구현(沃溝県) 북쪽 진포(鎮浦)에 있다.[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61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즉 세종 당시 군산진에는 중선 4척, 별선 4척 등 전선 8척에 수군 461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5세기 말에 편찬된 『경국 대전(経国大典)』에는 군산포는 종 4품 수군 만호(万戸)가 거느리고 대맹선(大猛船) 1척, 중맹선(中猛船) 2척, 소맹선(小猛船) 1척, 무군 소맹선(無軍小猛船) 4척 도합 8척의 전선이 배치되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대맹선은 80명, 중맹선은 60명, 소맹선은 30명의 수군을 승선시키도록 되어 있으므로 『경국 대전』에 따르면 군산포에는 230명의 수군이 배치되어 있었던 셈이다. 수군의 수만을 놓고 보면, 15세기 초 세종 때보다는 절반이나 줄어든 셈이다. 이를 통해 세종 대에 비해 『경국 대전』이 편찬되는 성종 대에는 수군 군액이 대폭 감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군은 외적의 침략을 해상에서 제압함으로써 외침을 막는 해방의 임무와 아울러 국가의 재정과 관료의 생활을 보장하는 조세미를 신속히 운반하여 국민 경제를 안정시킬 두 가지 임무가 있었다. 특히 군산진은 이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년) 9월 병술일에 전라감사 윤안성(尹安性)이
‘군산 만호(群山万戸) 등이 보고하기를 “본월 14일에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해적선 8척과 만났는데, 저들의 숫자는 많고 우리의 숫자는 적어서 결코 대적하기 어려우므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풀 속에 숨어서 어렵게 살아남았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는 바와 같이 군산진은 바다에서 외적의 침략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군산진은 1512년(중종 7) 전라도 관찰사 남곤(南袞)의 건의에 따라 용안에 있던 득성창이 군산포로 옮겨와 군산창이 되자 직접 군산창을 관리·감독하였다. 성산에 있던 진성창이 고려말 익산군 용안 방면으로 옮겨갔는데 이때 다시 군산창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전부터 군산진은 국방 임무와 조세 운반이라는 수군의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이후 1624년(인조 2)에 군산도에 고군산진이 다시 설치되어 해방 업무를 전담함에 따라, 군산진은 조운 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1710년(숙종 36)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 우도 군산진 지도(全羅右道群山鎮地図)』에는 1710년(숙종 36)에 군산진 만호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격하여 조운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전선(戦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능로군(能櫓軍) 245명, 조선(漕船) 19척, 조군(漕軍) 304명’을 두고, 조세는 19,000석을 받았다고 한다.
[군산창]
우리나라 전 근대 시기에 조세를 중앙으로 운반하는 작업은 조운(漕運)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조운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거둔 조세와 공물을 선박에 실어 수도로 운반하는 것을 가리킨다. 육로를 통하는 교통수단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던 당시로서는 수로 특히 해로를 통하여 조세를 운반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조운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해안과 강가에 조세미와 공물을 쌓아두는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모두 12개의 조창을 설치하였다. 그중 하나가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에 있던 진성창(鎮城倉)이었다. 그런데 고려 말 왜구의 약탈이 극심하자 조창은 내지 깊숙한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함열에 덕성창(德成倉), 영광에 법성창(法聖倉), 나주에 영산창(栄山倉)이 설치되어 전라도의 세곡을 나누어 수납·운송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운송 항로가 험하여 일찍부터 관할 구역의 변경이 논의되었다. 연산군 때 이극균(李克均)이 영산창·법성포창 등 두 곳의 조창을 군산포로 옮겨 설치할 것을 제의한 바 있으며, 1512년(중종 7) 영산창 조선(漕船)의 대규모 침몰 사고를 계기로 전라도 관찰사 남곤(南袞)에 의하여 영산창이 혁파되면서 용안(竜安)의 덕성창(徳成倉)을 옮겨 군산창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군산창은 용안·전주·임실·남원·임피·김제·장수·금구·운봉·익산·만경·여산·금산·진산·태인·옥구·진안·고산·무주·함열 등 덕성창이 원래 관할하던 고을과 새로 법성포창에서 이관한 흥덕·부안·고부·정읍 등 2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조운하였다.
임진 왜란 당시에는 조세미를 보관하고 있던 군산창은 정부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군량 확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8월 계해일에 영의정 유성룡은 조정에서 군산창의 조세미가 일본군에게 탈취될까 걱정된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우려에 따라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9월 16일 명량해협(鳴梁海峡)의 울돌목에서 단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일본 선단을 무찌른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고 명량해전 이후 쉴 틈도 없이 즉시 군산도로 뱃머리를 돌리게 된다. 군산창의 앞바다에 있는 군산도 부근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북상하여 위도를 거쳐 군산도에 도착한 것은 해전 6일 후인 9월 21일이었다. 『난중 일기(乱中日記)』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고군산도에 도착한 후 몸살로 몹시 앓았으며 가을 태풍으로 선박의 이동이 용이치 않았고, 그 와중에 의주의 조정에 명량해전의 승리를 전하는 장계를 써서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12일간 고군산도를 순시하고 고군산도의 안전을 확인한 후 떠났는데, 14개월 후인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라 할 수 있는 노량 해전(露梁海戦)에서 54세의 나이로 전사하게 된다. 이와 같이 군산창은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둔 후 쉴 틈도 없이 올라와 순시해야 할 정도로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세미를 수납·보관·운송하는 군산창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반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国家]’라는 유명한 글귀를 호남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한 말로 알고 있다. 그래서 전남 여수에 가면 큰 비석에 이 글귀를 새겨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이 글은 여수 보다는 오히려 군산에 어울리는 말이다. 이 글의 온전한 뜻을 알려면 이 글의 전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이충무공 전서(李忠武公全書)』, 부록에 실려 있는 영의정 이항복이 쓴 「충민사기(忠愍祠記)」에 처음 나오는 말인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공은 국가의 군량이 모두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생각하였다.[公以為国家軍儲 皆靠湖南 若無湖南 是無国家也]’
즉 이순신 장군은 호남의 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호남의 경제적 관문이 바로 군산진이었다. 조선후기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호남의 조운(漕運)은 영광의 법성창(法聖倉)과 군산의 군산창(群山倉), 익산의 성당창(聖堂倉) 등 3조창(漕倉)에서 관할하였다. 성당창은 용안의 덕성창이 폐지된 이후 다시 익산 지역에 만들어진 조창이다. 그런데 법성창은 법성만호가, 군산창과 성당창은 군산진 만호가 각각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군산진은 군산창과 성당창을 모두 담당하여 호남 최대의 조세곡 운반을 관할하는 관청이었던 것이다.
단일 조창(漕倉)으로는 법성창이 제일 규모가 크지만, 군산진에서 성당창과 군산창을 함께 관리하였으므로 군산진이 조선 최대의 조창 관할 관청인 셈이다. 17세기 초 광해군 대에는 군산창의 전세가 한양으로 올라오지 않으면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에 들어와 군산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후 군산창은 23척의 조선(漕船)이 배치되어 전주·옥구·진안·장수·금구·태인·임실 등 7개 고을의 전세미와 대동미를 수납·조운하는 관청으로 바뀌게 된다. .
그런데 1894년(고종 31) 갑오 개혁(甲午改革) 후 현물로 납부하는 대동미, 대동포 등의 제도가 폐지되어 군산창의 기능이 일시 쇠퇴하였다. 또한 다음 해인 1895년 윤 5월에는 각도 외병(外兵) 병정의 해산이 결정되어 군산진이 해체되자 군산창의 기능은 정지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1899년(광무 3) 5월 1일 군산 개항이 대한제국의 자주적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고, 개항과 동시에 군산에는 대한제국의 감리서, 경무서, 재판소, 세관, 우체국, 전신사 등이 설치되어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군산에 오기 전 군산은 갈대만 나부끼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였다고 주장한다. 1935년에 간행된 『군산 부사(群山府史)』 서문에서도 “개항 당시의 군산은 황량한 1개의 어촌에 지나지 않았고 인구는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호구 총수(戸口総数)』에 의하면 군산에는 14,649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호적에 등재된 숫자이고, 타지에서 군산창에 와서 근무하는 군인과 노무자들까지 포함한다면 2만 명 이상이 군산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1910년(융희 4) 일본인이 작성한 「민적 통계표(民籍統計表)」에도 군산 인구는 21,830명[군산창이 있는 북면에는 53,73명이 있었다]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군산이 인구 500명에 불과한 황량한 어촌이었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이다. 실제 1898년(광무 2)에 작성한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을 보면 일본인들 자신이 1만 ㎡에 달하는 (구) 군산진 건물 터에 영사관을 짓겠다는 기밀 문서를 보내고 있다. 한말까지 군산진 건물은 1만 ㎡에 달할 정도였으니 군산진은 조선 최대의 미곡 물류 관청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군산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도시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적인 인식에서 탈피하여 군산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야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