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14 |
---|---|
한자 | -同胞-群山地域-民族-勞動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희진 |
[정의]
근대기에 들어서 군산은 국제적인 교역지로서 개항되어 근대 물질 문명의 도시로 변모해갔는데, 한편에서는 제국주의 수탈의 교두보가 되기도 하였으나 군산 사람들은 주체성을 지키려는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으며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고 생존과 발전을 위한 다방면의 모색을 하여갔다. 나라를 잃어버린 속에서 군산 시민들은 연대해서 일본인 중심의 식민 정책에 대항해서 군산 시민 전체 그리고 한국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항쟁을 해나갔다.
[개설]
일제 강점기 1914년, 군산은 일본의 대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 속에서 쌀의 수탈항이라는 중요성으로 인해서 군산부가 되었다. 1914년 군산부의 행정 구역은 과거 조계지가 중심이 되고 옥구군의 일부를 포함하여 8개면[북면, 박면, 풍장면, 동면, 서면, 정면, 미면] 171동이었다. 이후 일제 강점 전 기간 동안 3차례 행정 구역의 변경, 확장이 있었다. 군산부와 일본인들은 쌀의 수탈량이 증가함과 더불어 상업 도시로서 성장하고 부를 축적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일본인만을 위한 것으로 군산부의 한국인들은 보호해줄 국가가 없는 속에서 피지배민으로서의 차별들과 수탈을 겪어야했다.
군산이 상업 도시로 성장해가자 인근 지역의 몰락 농민, 지식인, 자산가 등이 새로운 삶을 찾아 군산으로 모여들었는데, 특히 군산에는 식민지 조국 하에서 민족 운동, 사회 운동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 활동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청년회나 교육 후원회, 노동 조합 등 다양한 단체들이 만들어져 소속원들에 대한 교육 활동이나 권익 보호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들은 연대해서 일본인 중심의 식민 정책에 대항해서 군산 시민 전체 그리고 한국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특히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군산 시민 대회 등을 개최하여 일인들에 대항해서 군산 시민들의 삶을 지키려는 노력들을 지속적으로 해 나갔다.
[군산 시민들의 연대를 통한 동포 보호]
- 일인들의 노동자 이간책에 대응한 연대활동
군산에는 개항 초기부터 부두에서 하역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회사와 조합의 성격을 혼합시킨 노동 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다. 1920년대 들어서는 더욱 발달하여 철도, 운수 노조, 미선공 조합을 비롯한 30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이 만들어져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므로 군산은 전국적으로 노동 운동의 중추지대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비슷한 노동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 결성한 노동 조합들을 상호 경쟁시킨 뒤에 일을 맡기는 방법으로 한국인들을 통제하고 임금을 낮추면서 이윤을 추구해갔다. 그러므로 같은 노동에 종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로 조직된 노동 조합들 사이에는 일본인 회사의 일감을 두고 대립하고, 커다란 충돌이 생기는 사건들이 발생하곤하였다. 그러므로 군산 노동 조합의 가장 커다란 과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는 것과 아울러 일본인에 대항하여 한국인들이 협력하여 일을 배분하는 것이었다.
1928년 군산 노동회가 중심이 되어서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자’는 목표를 걸고 노동 조합들이 연대하여 한국인들 스스로 일감을 분배하자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동아 일보』 1928년 3월 9일] 이러한 문제는 전국적으로 노동계의 커다란 당면 과제였는데,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한 것은 군산 노동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동아 일보』에서는 ‘조선 노동계에 있어서 차 이상적 작업이 효시인 만큼 일반은 차 실현에 대한 촉망이 많다더라’라고 기대에 차서 대서 특필 하기도 했다. 이후 군산 노동 단체들이 연대한 군산 노동 연맹에서는 이러한 방안을 실행하기 위하여 유사 노동 조합을 통합할 것을 의결하고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반대로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연대를 통한 동포 구호는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되어갔다.
-단연 동맹(斷煙同盟) : 조합원과 동포의 구호를 위한 연대
일제 강점기 군산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군산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의 농업 수탈로 인해 소작농에서 마저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살길을 찾아서 군산에 왔으나 당장은 거처할 곳조차 마련할 수 없었으므로 산비탈에 토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 군산의 주택난은 매우 심각해서 토막민이 인구 대비로하여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이러한 거주의 불안정을 군산의 대표적인 노동단체인 철도 노동회에서는 조합원들이 연대해서 해결하기도 했다.
군산의 철도 노동회에서는 주택을 임대해서 회관과 조합원들의 공동 주택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임대로가 체납되자 가옥주가 엄동설한인 1924년 12월 16일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하며 회관의 문짝을 뜯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철도 노동회에서는 총회를 열어 대책을 마련했는데 공동 주택 마련을 위한 단연 동맹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동아 일보』 1924년 12월 30일]
철도 노동회의 모든 조합원들이 60일간 단연을 하고 그 결과 생기는 자금으로 매일 5전씩을 조합에 납부하여 회관을 매입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정은 잘 지켜져서 다음 해인 1925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새로운 주택의 입택식을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조선 일보』 1925년 5월 4일]
군산 철도 노동회의 이러한 미담은 당시 사회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이 사실은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에 상세하게 기사화 되어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군산 지역의 노동 단체들은 조합원들의 권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군산 지역민들의 교육이나 권익을 위해서도 활동하였으며 군산 지역 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동포구호를 위한 활동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군산 철도 노동회에서는 1928년 관북 지역에 심각한 수재가 일어나자 가난한 자신들의 상황에서도 동포를 구호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이들은 관북 수재일을 정하고 그 날에는 담배와 밥을 굶고, 게다가 당일의 임금을 모아서 수재의연금으로 기탁하였다.[『동아 일보』 1928년 11월 14일]
이처럼 군산에는 많은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뿐 만 아니라 연대해서 동포를 구호하는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일제 강점의 참혹한 시기에도 군산 지역은 한국인 민족 운동, 사회 운동의 중추 지대로 추앙받으면서 기대가 모이는 곳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