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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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趾源 |
영어공식명칭 | Bak Jiwon |
이칭/별칭 | 연암(燕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학로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당진의 면천 군수를 지낸 문신·학자.
[개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당대 내로라하는 반남 박씨 노론 명문가 출생이었다. 박지원은 학문이 뛰어났으나 1765년 처음 본 과거에서 낙방한 이후로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오늘날의 파고다 공원 자리인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하여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득공(柳得恭)·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였던 박지원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박지원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연암협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열하일기』를 남겼다.
[가계]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연암(燕巖)이다.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이고,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 어머니는 이창원(李昌遠)의 딸 함평 이씨(咸平李氏)다. 개항기 개화파 대신 박규수(朴珪壽)가 손자이다.
[활동 사항]
박지원은 1737년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첫 과거 시험에 낙방한 이후 출사하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1789년 평시서·사복시 주부, 1791년 한성부 판관, 1792년 안의 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 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800년 양양 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 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 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의 저서를 남기게 하였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이 책들은 박명원을 수행하고 북경을 다녀와 견문을 정리한 『열하일기』와 더불어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 보인 작업의 한 부분이다.
박지원은 많은 문학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초기에 쓴 아홉 편의 단편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이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 「양반전」의 경우는 조선 시대 봉건 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선비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규범을 제시하고 있어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북경을 여행한 이후에 쓴 두 편의 단편은 여행기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역시 박지원의 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중에서 「허생전(許生傳)」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박지원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와 함께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학문과 저술]
박지원의 저서로는 『열하일기』,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 등이 있다. 작품으로는 「허생전」,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양반전」, 「김 신선전(金神仙傳)」, 「역학 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 학자전(鳳山學者傳)」, 『면양 잡록』, 『연암 선생 서간첩』, 『칠사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