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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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尙監營 大邱 設置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601년 5월 24일 - 경상감영 대구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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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895년 - 경상감영 대구 해체 |
발생|시작 장소 |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종결 장소 |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정의]
1601년 2월 4일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된 사건.
[개설]
조선 전기 경상감영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 있었다. 경상도는 면적이 넓어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기도 하였는데, 경주는 좌도의 감영이었고 상주는 우도의 감영이었다. 경상감영은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601년(선조 34)에 대구에 설치되었다.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1599년(선조 32)에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1561~1613]이 대구에 내려와 관찰사(觀察使) 한준겸(韓浚謙)[1557~1627]과 함께 감영을 대구에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심하여 잠시 보류를 하였다. 2년 후 1601년 2월 4일에 체찰사 이덕형이 대구에 내려와 6일까지 달성(達城)에 머물렀는데, 이때 감영을 다시 대구에 설치할 계획을 하고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렸다. 그래서 동년 음력 5월 24일에 정식으로 감영을 설치하였다. 대구에 설치된 감영은 이전과는 달리 유영(留營)이었다. 다시 말하면 관찰사가 감영(監營)에 머물면서 소속된 71고을[邑]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후 경상감영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경상감영을 대구에 설치한 이유는 경상도의 중앙으로 영남의 각 지역에 행정력이 전달되기에 유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군사와 교통의 요지로서 대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경상감영이 임진왜란 중인 1594년에 명(明)나라 군사가 주둔한 팔거(八莒)에 설치되었다가 1596년에 대구의 달성(達城)으로 옮긴 것으로 사정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행정, 군사, 교통에서 대구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경과]
경상감영은 1601년에 설치된 이후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府)로 개편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결과]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후 대구는 영남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대구는 서울, 평양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상감영의 대구 설치는 경상도의 각 지역이 대구를 중심으로 하나로 결집되어 영남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였다. 또한 대구는 행정과 군사, 교통뿐만이 아니라 경제와 인구,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