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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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이칭/별칭 | 이조시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1392년부터 1897년까지 대구 지역에 조선왕조가 있던 시대.
[조선 전기의 대구]
고려시대에 대구는 1143년(인종 21) 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하면서 화원현과 하빈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그러나 1401년(태종 1) 경산부에 어태를 안치하고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화원현은 성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종래의 하빈현에 수성현과 해안현을 새로이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대구현은 호수(戶數)가 1,300호가 되었기 때문에 1419년(세종 1)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였다.
1425년(세종 7) 하연(河演)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금유(琴柔)가 인동현감 김빈(金鑌)과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1448년(세종 30)에는 전 감찰 안종생(安從生)을 대구군에 보내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의 외조부 증 좌의정 송선(宋璿)의 묘(墓)를 수리하고 표석(表石)을 세우기도 하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의 아내이자 세종의 어머니였다.
1466년(세조 12)에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대구부]로 승격하였다. 읍격(邑格)의 승격은 인구의 증가 및 이에 따른 조세 수입 증가를 반영한 결과였다. 또한 진관제도(鎭管制度)의 확립에 따라 대구진(大丘鎭)이 성립되는 등 지리적·군사적 중요성이 큰 몫을 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대구부는 군사 작전과 지리적인 측면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주요 도로인 동시에 조선군과 명군이 일본군의 전라도·충청도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요충지였다.
[조선 후기의 대구]
1601년(선조 34)에는 대구부에 감영이 설치되었으며, 선화당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이때 감영의 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인근의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화원현(花園縣) 등을 내속(來屬)하였지만, 1607년(선조 40) 2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곧 하삼도(下三道)의 감영이 혁파됨에 따라, 1607년 5월 하양현과 경산현은 독자적인 군현으로 독립하였고, 화원현은 다시 성주목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1685년(숙종 11)에 화원현 8개 방(坊)과 풍각현 4개 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그 후 대구도호부의 영역은 대구본부와 수성현·하빈현·해안현·화원현·풍각현 34면을 포괄하는 경상도의 정치·경제·군사·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이 무렵 경상감사가 대구부사를 겸임하였기 때문에, 대구부는 대구판관이 관할하였다.
1789년(정조 13) 조사에 의하면 대구도호부는 1만 3413가구에 주민이 6만 1477명이었다. 경상도 71개 고을 가운데 상주목·경주부·진주목 다음에 해당하였다. 이 무렵 대구부에서는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의 중구에 해당하는 동상면과 서상면은 각각 6,473명과 7,411명으로 대구부 인구의 1/5[22.6%]에 이를 정도였다. 동상면과 서상면 지역이 경상도의 중심지로서 각종 관아와 시장을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