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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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琴湖同舟詩序 |
영어공식명칭 | Keumhodongjusiseo |
이칭/별칭 | 금호동주시의 서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정의]
조선 후기 문신인 여대로가 1601년 대구의 금호강에서 벗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지은 시집에 부치어 쓴 서문.
[개설]
「금호동주시서(琴湖同舟詩序)」의 저자 여대로(呂大老)[1552~1619]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자는 성우(聖遇)이고, 호는 감호(鑑湖)이다. 아버지는 여응구(呂應龜)이고, 어머니는 신일(辛馹)의 딸이다. 서사원(徐思遠)[1550~1615], 장현광(張顯光)[1554~1637], 정경세(鄭經世)[1563~1633] 등 영남의 유림들과 교류하였다. 대구판관과 합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김천의 경양서원(鏡陽書院)에 봉향되었다. 문집으로 『감호집(鑑湖集)』이 있다.
「금호동주시서」는 1601년 3월 3일에 대구 지역과 인근 지역의 선비들이 서사원의 별장을 방문하고,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와 달성군으로 흐르는 금호강(琴湖江) 일대에서 뱃놀이를 즐긴 과정과 내용을 여대로가 기록한 작품이다. 서사원의 문인인 김극명(金克銘)[1581~?]의 부탁으로 1601년 3월 23일에 창작되었다. 당시 뱃놀이를 묘사한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가 남아 있다.
[구성]
「금호동주시서」는 벗들과 함께한 금호강 유람에 대한 세세한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금호강 유람의 회합 장소인 서사원의 별장 위치와 별장 이름의 의미를 밝히며, 「금호동주시서」 서문을 열었다. 본문에서는 장현광을 비롯한 벗들이 모였음을 알리고, 과거 최치원(崔致遠)[857~?]이 노닐었던 난가대(爛柯臺)의 옛 터가 보이는 선사 나루터에서 금호강 유람의 시작을 알렸다. 배 위에서 바라보이는 풍광과 오늘의 뱃놀이를 함께하는 벗들을 왕발(王勃)[650~676]이 「등왕각서(藤王閣序)」에서 말한 ‘사미(四美)’와 ‘이난(二難)’으로 표현하였다. 저물녘까지 배를 타고 금호강 하류의 부강정(浮江亭)에 배를 대고 나뉘어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만나 뱃놀이를 시작하며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은 과정을 상세히 말하였다. 결문에서는 이번 만남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말하고 「금호동주시서」를 쓰게 된 계기를 밝히며 글을 마무리하였다.
[특징]
「금호동주시서」는 금호강을 유람하면서 지은 여러 벗들의 시와 유람의 과정을 남기기 위하여 지은 작품이다. 내용이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기록되어 당시의 사정을 확인할 수 있고, 뱃놀이에 참여한 인원과 시작(詩作)의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금호동주시서」는 17세기에 대구 지역에서 번성한 금호강 뱃놀이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끝난 후 대구 지역과 영남 지역의 명사들의 교류 양상과 조선 후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 선비들의 풍류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현재 전하여지는 「금호동주시서」와 당시의 뱃놀이를 묘사한 그림인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를 통하여 23명의 지역 선비들이 참여한 규모 있는 모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구를 중심으로 성주, 인동, 영천, 김산[김천], 창녕, 서울 등 총 7개 지역에 거주하던 선비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모임은 서사원을 중심으로 학연과 지연, 혈연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17세기 초반 낙동강 중류 연안 지역 선비들의 삶과 연대의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