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53 |
---|---|
한자 | 狎鷺亭 小有亭 - 琴湖江-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충희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의 왕옥산 언덕에 있었던 정자인 압로정과 소유정 아래 금호강에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선유 문화.
[개설]
압로정(狎鷺亭)과 소유정(小有亭)은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1529~1584]이 금호강 강변에 있는 왕옥산 언덕에 지었던 정자이다. 왕옥산은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에 있는 금호강 강변의 낮은 산이다.
채응린은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이 건립되었던 1565년 무렵에 연경서원의 강학에 참여한 학자이다. 27세에 소과(小科)에 합격한 후에 다시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육경의 심오한 뜻이나 성리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채응린은 이러한 공부를 할 때 퇴계(退溪)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계동 전경창(全慶昌)[1532~1585]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채응린이 교유한 인물은 전경창 이외에도 전경창의 형인 전응창(全應昌)[1529~1586],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 연정(蓮亭) 서형(徐浻)[1524~1575] 등이 있었다. 모두 연경서원의 초창기 강학에 참여하여 대구 지역에 성리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공헌자들이다.
채응린은 33세 때인 1561년 금호강 강변의 왕옥산 자락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금호강은 대구 읍성의 북동쪽에서 대구 분지 외곽으로 흘러들어 서남 지역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채응린이 자리 잡은 곳은 대구 읍성에서 팔공산을 바라보는 방향인 읍성의 북동쪽 지역을 흐르는 금호강 강변이다. 채응린은 금호강을 도로처럼 이용하는 이동의 편의성 때문만이 아니라 금호강과 팔공산을 바라보는 빼어난 경관 때문에 그 자리를 선택하였다. 채응린은 왕옥산 산기슭에 먼저 압로정을 지었고, 다시 압로정보다 더 높은 산 언덕에 소유정을 지었다.
압로정과 소유정은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없어지고 중건하는 과정을 거듭하였지만, 학자와 관리, 시인들의 발걸음은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압로정이나 소유정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금호강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금호강은 대구 지역을 이동하던 사람들의 교통로이자 학문이 전달되는 통로였으며, 뱃놀이를 즐기는 휴식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금호강 주변에는 압로정이나 소유정 같은 누정이 많이 지어졌는데, 특히 소유정은 대구 제1의 정자로 이름나 있었다.
[압로정과 소유정의 변천]
채응린은 1561년 금호강변 왕옥산 산기슭에 압로정을 지었고, 몇 년 뒤에 왕옥산 가장 높은 언덕에 소유정을 지었다. 압로정은 이름은 정자이지만 주거하며 생활하는 건물이었음을 현존하는 압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유정은 압로정에서 조금 올라가면 있는 왕옥산 언덕 꼭대기에 지었다. 소유정 자리는 금호강을 멀리 내려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팔공산을 두루 조망하기에 좋은 곳이다. 주거 공간을 겸하던 압로정에 비하여 소유정은 자연을 벗삼아 수양할 수 있는 순수한 누정의 기능이 있었던 공간이었다.
채응린이 창건한 압로정과 소유정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채응린의 아들 채선길(蔡先吉)[1569~1646]이 1609년에 소유정만을 중건하였다. 압로정은 이때 중건되지 못하고 1655년 채선길의 아들 채직(蔡樴)[1609~1686]에 의하여 중건된다. 그 후 채직은 친족이 살고 있던 팔공산 아래에 있는 미대동에 들어가 거주하였는데, 1673년 마을의 불량배들이 소유정과 압로정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소유정과 압로정은 이렇게 두 차례의 화마를 입었다.
소유정은 1673년에 불타고 난 뒤 아직까지 중건되지 못하였다. 압로정은 1796년에 이르러 채응린의 8대손 채필훈(蔡必勳)[1759~1838]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채필훈에 의하여 중건된 압로정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소유정제영록』과 『소유정회화록』]
조선시대에 압로정과 소유정은 금호강 변에 있는 전망 좋은 정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래서 대구 지역의 학자와 관리들 및 타 지역의 시인묵객들도 금호강 수로를 이용하여 방문하였다. 압로정과 소유정을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시문이나 회합에 대한 기록은 『소유정제영록(小有亭題詠錄)』과 『소유정회화록(小有亭會話錄)』이라는 필사본 책자에 전해지고 있다.
『소유정제영록』에는 소유정을 건립한 채응린과 소유정을 방문한 90여 명이 지은 시 126수가 실려 있다. 『소유정제영록』에 있던 임진왜란 전의 시는 채응린의 원운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에 타서 사라졌고, 남아 있는 시들은 1609년에 채선길이 소유정을 중건한 이후 1673년에 소유정이 마을의 불량배에 의하여 불타기 전까지의 시들이다.
『소유정회화록』은 채응린의 8대손 채필훈이 압로정을 중건한 이후 압로정을 방문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다. 채필훈은 소유정은 중건하지 못하고 압로정만 중건하였다. 그런데 이때 새롭게 중건된 압로정을 두고 ‘소유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압로정과 소유정이 인천채씨 가문이 지은 것일 뿐만 아니라 나지막한 왕옥산 언덕 기슭과 언덕에 서로 가까이 있던 정자였기 때문이었다. 현존하는 압로정을 보더라도 처마 앞에는 ‘압로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마루 안의 대청 모서리에는 ‘소유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1796년에 채필훈이 중건한 건물은 압로정이었지만 ‘소유정’이라고 호칭하더라도 아무도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1796년 채필훈이 중건한 압로정에서 선비들의 모임이 있을 때 관련 기록을 모은 책을 『압로정회화록』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정회화록』이라고 호칭하였다. 『소유정회화록』에 1796년 이후의 압로정을 두고 ‘압로정’이라고 표현한 글도 있고, ‘소유정’이라고 표현한 글도 실려 있다.
[금호강의 선유(船遊) 문화]
금호강은 대구시 동구, 북구, 달성군 지역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하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자동차가 주요한 교통의 수단인 지금 도로가 중요하듯이 조선시대에는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이 중요시되었다. 조선시대에 강은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학문이 전달되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금호강이 낙동강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구 지역의 학문은 낙동강으로 연결되는 경상남북도의 학문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었다.
퇴계가 이룬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타고 대구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대구 지역에 퇴계의 학문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퇴계의 제자로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 계동 전경창,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들 수 있다. 매암 이숙량은 안동 예안에서 대구 무태로 이사 와서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창건하였다. 계동 전경창은 대구에서 태어나 퇴계에게 나아가 수학하고 돌아와 계동정사(溪東精舍)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한강 정구는 젊은 시절 퇴계와 남명(南冥) 두 사문을 찾아 수학한 뒤 고향인 성주와 지금은 대구시에 편입된 대구시 북구 사수동(泗水洞)[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부근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대구 지역에 성리학이 전파된 이후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1547~1615],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 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1561~1638], 문탄(聞灘) 손린(孫遴)[1566~1628], 사월당(沙月堂) 유시번(柳時藩)[1569~1640],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兪)[1571~1649],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1574~1640],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1578~1665],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1586~1661]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나와 후학들을 길렀다.
이 무렵의 학자들 중에는 금호강 가에 경관이 좋은 터를 골라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낙재 서사원은 1601에 이천(伊川) 부근의 선사(仙査)에 완락재(玩樂齋)를 짓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한강 정구는 성주에 있는 무흘정사(武屹精舍)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612년 팔거현(八莒縣)[지금의 칠곡] 노곡(蘆谷)으로 이사하였고, 1614년에는 금호강 변인 대구 북구 사수동에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그리고 이 무렵 금호강 가에는 선비들이 만나서 학문을 논하기도 하고 시를 읊으며 휴식하기도 하는 장소인 정자가 많이 지어졌다. 송담 채응린이 압로정과 소유정, 전응창의 세심정(洗心亭), 윤대승(尹大承)[1553~?]의 부강정(浮江亭), 낙애 정광천의 아금정(牙琴亭),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1566~1638]의 하목정(霞鶩亭), 태암 이주의 환성정(喚醒亭) 등 많은 정자가 지어졌다.
금호강 변에 있었던 이러한 정사(精舍)와 정자(亭子)에 머물던 선비들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였다. 배는 단순한 교통수단이기도 하였지만 흥겨운 놀이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여러 사람이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즐기는 선유(船遊) 문화는 예부터 있어 왔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뱃놀이와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에 나오는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의 뱃놀이는 선비들의 선유 문화의 표상처럼 이야기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금호강에서의 선유는 서거정(徐居正)의 ‘달성십경(達城十景)’에도 나온다. 달성십경(達城十景) 가운데 「금호범주(琴湖泛舟)」를 보면,
琴湖淸淺泛蘭舟 금호강 맑고 얕은 곳에서 놀잇배 띄우고,
取次閑行近白鷗 한가롭게 노닐며 갈매기와 친해지네.
盡醉月明回掉去 밝은 달에 취하여 노 저어 돌아가니,
風流不必五湖遊 오호(五湖)가 아니라도 풍류 있게 놀 수 있네.
라는 내용이 있는데 금호강에서의 뱃놀이 풍류가 중국의 오호(五湖)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대구 지역에 산 문인들의 문집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금호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쓴 시가 들어 있다. 해방 이후에도 금호강에서의 뱃놀이는 이어졌다. 1898년에 태어나 1961년 작고한 최해종(崔海鍾)의 한시를 모은 『소정시고(韶庭詩稿)』에도 「압로정(狎鷺亭)에 모여서 배를 띄우고 달을 감상함[狎鷺亭大會泛舟賞月]」, 「강정에서 뱃놀이를 함[江亭泛舟]」, 「음력 16일에 동쪽 금호강에서 뱃놀이를 함[旣望東琴湖泛舟]」 등 여러 편의 금호강 관련 한시가 실려 있다. 이때보다 선유 문화가 활발하였던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수많은 금호강 선유 관련 문학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