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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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承東 |
영어공식명칭 | Park Seungd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박승동 국채보상운동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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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민족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금연상채회 회원 |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박승동(朴承東)[?~?]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가 설립되었고, 2월 21일 대구민의소 주최로 서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을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박승동은 대구 금연상채회에 가입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이 침체되고 있던 1908년 8월 26일 금연상채회가 전 국민의 대동 결의를 주장하며 서울의 경성지원금총합소에서 전국 회의를 소집하는 공고문을 낼 때 박승동은 서상돈·이현주(李玄澍)·정재학(鄭在學) 등과 함께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