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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07
한자 金光濟
영어공식명칭 Kim Gwangje
이칭/별칭 김홍제(金弘濟),동양자(東洋子),덕재(德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6년 7월 1일연표보기 - 김광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김광제 고군산도 유배
활동 시기/일시 1906년 1월 - 김광제 대구 광문사 사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5월 - 김광제 인민대의소 총의장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김광제 대동광문회 부회장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김광제 국채보상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김광제 대한협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김광제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20년 7월 24일연표보기 - 김광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김광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광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평리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김광제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구광문사 사장|대동광문회 부회장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김광제(金光濟)[1866~1920]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광제는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덕재(德在), 호는 동양자(東洋子)이다. 어릴 적 이름은 김홍제(金弘濟)이다.

[활동 사항]

김광제는 1866년(고종 3) 7월 1일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에서 태어났다. 1888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훈련원첨정, 비서원승,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 등을 지냈다. 1905년 배일 및 내정 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고산군도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특별 사면되었다.

김광제는 1906년 1월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5월에는 계몽운동 단체인 인민대의소(人民代議所) 설립을 주도하고 총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인민대의소의 설립 취지는 민지개발(民智開發)과 민권부식(民權扶植), 자치 및 자강을 통한 국권 확립 등이었으며, 지방 관청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1907년 1월 29일에는 광문사 내에 경상북도 각 군의 유지들로 구성되어 있던 문회(文會)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변경하기 위한 특별총회에 참여하여 대동광문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진 대동광문회 결성 자리에서 서상돈국채보상운동을 제기하자, 김광제국채보상운동의 발기 연설을 마친 후 즉각 실행을 제의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담뱃대와 담뱃갑을 버리고 의연금 70전을 내놓았는데,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1907년 3월에는 대한자강회 임시평의회에 국채 보상에 관한 의안을 제출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김광제대동광문회가 설립한 사립 보통학교의 교장과 달명의숙(達明義塾) 부교장 겸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1908년 대한협회에 가입하고 호남시찰원으로 활동하였다. 김광제는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자 중국 만주와 일본 등지를 방문하며, 독립운동의 정세를 파악한 뒤 1920년에 귀국하여 제2의 3·1운동을 준비하는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2월 16일에는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노동대회발기회를 주도하였으며, 2월 25일 취지서를 발표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장과 경성본부장을 맡으면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서기도 하였다. 김광제는 1920년 7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광제는 우리나라 역대 시 가운데 도덕과 충의와 관련된 것을 모아 1917년 『동국풍아(東國風雅)』 6권 2책을 간행하였다.

[묘소]

김광제의 묘소는 보령시 웅천읍 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광제의 공적을 기려 1982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7년 2월에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흉상이 건립되었다. 4월에는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독립지사 김광제선생추모사업회’가 발기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7.03 내용 수정 1915년경 만주로 망명하여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으며,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0년에 귀국하여 제2의 3·1운동을 준비하는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광제는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자 중국 만주와 일본 등지를 방문하며, 독립운동의 정세를 파악한 뒤 1920년에 귀국하여 제2의 3·1운동을 준비하는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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