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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9월 총파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99
한자 大邱 九月總罷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9월 23일연표보기 - 대구 9월총파업 시작
성격 노동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남조선총파업대구시위원회

[정의]

1946년 9월 대구에서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의 주도로 전개되어 10월항쟁으로 이어진 총파업.

[역사적 배경]

대구 9월총파업(大邱九月總罷業)조선공산당이 1946년 7월 이후 미군정에 대하여 채택한 ‘신전술’의 발표를 계기로 적극적인 방식의 대중투쟁으로 미군정을 압박하는 정치투쟁을 벌이면서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총파업은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에 파급되었다.

[경과]

대구 9월총파업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대구 지역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의 지도로 1946년 9월 23일 오후 3시 무렵 철도기관구 노동조합원 1,000여 명이 파업하면서 시작되었다. 철도기관구 노동조합은 파업 시작과 동시에 ‘대구철도쟁의단’을 구성하였다. 대구철도쟁의단은 9월 24일 일급제 반대, 임금인상, 쌀 배급, 해고 반대, 급식 부활 등의 요구 조건을 담은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1946년 9월 26일 오전 6시 체신 노조원이 ‘임금인상’, ‘쌀 배급을 늘려라’, ‘당일 임금은 당일에 지불하라’를 요구하고 ‘철도 파업 절대 지지’를 주장하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대구 9월총파업은 1946년 9월 27일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섬유산업 노조, 인쇄 및 출판 노조, 화학 노조, 조선중공업 대구지부 노조 등으로 확대되었다.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윈회 위원장은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위원장 윤장혁이 맡았다. 언론사 중 좌익 성향의 『민성일보』가 1946년 9월 27일자 신문부터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영남일보』, 『대구시보』, 『경북신문』, 경북인쇄소 소속 노동조합원은 9월 29일부터 파업을 벌이고 9월 30일자 신문 제작을 거부하였다.

대구 9월총파업은 1946년 9월 27일 기준 철도 노동자 1,200명, 섬유 노동자 1,800명, 체신 노동자 1,200명, 출판 노동자 112명, 기타 노동자 660명 등 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9월 30일 기준 대구와 경상북도 30여 개 업체의 참가로 확대되었다. 각 파업 현장에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윈회 지부를 설치하였고, 지부 중심으로 자경대를 편성하여 파업 투쟁을 강화하였다. 대구 9월총파업이 확대되자 1946년 9월 27일 경상북도를 책임지고 있던 헤론 미군정 지사와 김의균 경상북도지사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에 협상을 요구하며, 도지사실에서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의장 윤장혁과 노동조합 주요 간부 4명과 함께 파업 철회 협상을 벌였다.

대구 9월총파업은 1946년 9월 30일 미군정이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의 간판 철거를 요구하면서 파업단과 경찰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오후 1시 무렵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의 간판 철거를 놓고 파업단과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0월 1일 아침 100명의 무장 경찰대와 기마경찰대원이 대구역 광장에서 서쪽을 향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장한 채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10월 1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주변에는 철도·운수·화학·섬유 노동조합원 등 수천 명의 노동자가 ‘파업 요구 조건 관철’이라는 구호 아래 쌀 배급, 일급제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령 취소하라”를 외치며,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면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0월 1일 오후 6시 무렵 파업단과 경상북도 치안 책임자인 권영석 경찰청장과의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간판 철거 담판 결과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풀고 철수하면 간판도 떼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경찰이 철수하는 와중에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결과]

1946년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면서 대구 9월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사수하였고, 민주주의민족전선대구시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는 비상 대책 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대책을 모색하였다. 비상 대책 회의에는 민주청년동맹 대구시위원회, 청총, 부녀동맹 대구지부, 농민조합 임원, 경북문화건설연맹 산하 각급 조직과 학생회 간부들이 참석하였다.

비상 대책 회의 결과 1946년 10월 2일 총동원하여 경찰에 대한 규탄과 책임을 추궁할 계획이었다. 1946년 10월 2일 오전 10시 수백 명의 무장경찰과 기마경찰이 대구역 일대의 교통을 차단하고 경계에 나섰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수천 명은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앞에 집결하였다. 파업노동자와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오전 11시 무렵 경찰의 파업노동자와 시민에 대한 발포로 십수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0월항쟁의 폭발이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 9월총파업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지도로 발생한 총파업이지만 대구의 노동자들에게는 정치투쟁과 아울러 생존권과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쟁의였다. 그러나 대구 9월총파업10월항쟁을 폭발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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