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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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藥令市 振興期成同盟會 |
이칭/별칭 | 대구영시진흥동맹회,대구약령시진흥동맹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설립 시기/일시 | 1923년 12월 7일 -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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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경제단체 |
설립자 | 대구한약업조합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약령시의 진흥을 위하여 한약업 조합이 세운 경제 단체.
[개설]
대구 약령시는 경상감영의 객사(客死)인 달성관(達城館)을 중심으로 봄·가을 두 차례 정기적으로 약령 시장을 개설한 데서 시작되었다. 1908년 일제에 의한 경상감영 객사 철거로 대구 약령시는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으로 이전하였다. 대구 약령시가 남성정으로 이전한 이후 약령시의 운영 및 관리는 상인들이 만든 자치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조선시장규칙」을 공포하고 공공단체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가 아니면 시장을 경영할 수 없도록 하였다.
1915년 도령(道令)에 의하여 대구 약령시는 대구부 관할이 되었다. 약령시를 대구부가 관할하게 되면서 약령시는 위축되었고, 조선인 한약업자의 이권 역시 축소되거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대구 약령시를 민족의식 앙양의 집결지로 판단한 일제가 대구 약령시의 세력 분산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 진주와 전주에 약령시를 열도록 인가하였다. 더불어 1920년대 초 경제불황으로 대구 약령시의 약재 거래량이 줄어들었다. 심지어 전주 약령시와 진주 약령시의 거래량이 대구 약령시를 능가하면서 대구 약령시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설립 목적]
대구 약령시의 한약업자들은 전국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한약재의 품질검사를 철저히 하여 대구 약령시의 신용도를 높이고, 쇠퇴하는 대구 약령시의 부흥을 위하여 1923년 12월 7일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藥令市振興期成同盟會)를 조직하였다. 대구 한약업자 조합이 주도하여 조직한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는 대구영시진흥회, 또는 대구약령시진흥동맹회로도 불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 한약업자 조합장 양익순(梁翼淳)과 조합 회원들은 대구영시진흥선전대회를 열고 각계 유지와 함께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12월 7일 만경관에서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대구 약령시의 번영과 동업자의 구제 방안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협의 결과는 첫째, 한약업자에 대한 금융 편의를 제공한다, 둘째, 약재류의 철도운임을 경감한다, 셋째, 대구부 밖에서 오는 시자(市者)[장사하는 사람]에 대한 임시 가채(假債)를 할인한다, 넷째, 여관의 설비 개선 등과 같은 부흥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등이었다.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는 공정거래, 상업금융, 철도운임 특혜 등 대구 약령시의 부흥을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였다.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가 대구 약령시의 부흥 사업을 전개한 결과 총 거래액이 1914년 6만 8000원이었던 것이 1926년에는 83만 8000원으로 증가하였고, 1940년에는 161만 원에 달하였다. 대구 약령시가 번창함에 따라 지역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다.
[의의와 평가]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는 일제에 의하여 축소된 상권을 확보하고 쇠퇴하는 약령시를 부흥하기 위하여 조직되어 대구 약령시의 부흥과 지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