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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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城路 |
영어공식명칭 | Namseong-ro |
이칭/별칭 | 남문밖,남문의리,남성밖,남문의,남의리,남성동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권 |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에 속하는 법정동.
[개설]
남성로(南城路)는 대구광역시 중구 법정동 57개 중 하나이다.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에 의하여 대구읍성이 허물어지자 이전의 남쪽 성곽 자리에 남성로 거리가 조성되었다. 경상감영 일대에 있었던 약령시도 남성로로 옮겨 오면서 자연스레 약전골목으로 변하게 되어 남성로 일대가 부촌으로 발전하는 계기기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남성로 주변의 종로, 진골목 등지는 대구의 이름난 부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고급 음식점과 술집도 성업을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광복 후에도 지속되었다.
자연 마을로는 뽕나무골목, 오동나무골목, 실가게골목 등이 있다. 실을 팔던 점포들이 많아 유래된 실가게골목은 염매시장에서 약전골목 진입로 일대이다. 주위에 대성양말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화장품 가게를 시작으로 나중에 잡화상을 거쳐 광복 이후 대구에 섬유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실 가게가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는 다른 업종으로 모두 대체된 상태이다.
[명칭 유래]
대구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밖에 있던 마을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일명 남문밖, 남문의리, 남성밖, 남문의, 남의리, 남성동 등으로도 불렸다. 1906년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허물기 시작하여 1907년 공사를 마쳤다. 성곽이 완전히 해체되고 나니 남쪽 성곽이 있던 곳에 빈 공간이 생겨나 남성로 거리가 조성되었다. 또한 남성로를 중심으로 주변 마을을 통칭하여 ‘남성로’라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대구부 서상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상동·서내동·남중동·남하동의 일부를 합하여 남성정(南城町)이라 하였다. 1947년에 남성정을 남성로로 변경하였다. 1963년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대구시 중구에 소속되었다. 이후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따라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남성로, 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가 되었다. 남성로는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성내2동이다.
[자연환경]
대구분지 한가운데 위치하는 중구의 특성상 도시화 이전부터 평지였다. 분지 한가운데를 남에서 북으로 관류하는 신천 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도시화 이전에는 신천의 분류로 인한 습지가 곳곳에 발달하였다. 남성로 남쪽으로는 앞산에서 발원하여 달서천으로 합류하던 대구천이 흘러갔으나 현재는 복개된 상태이다.
[현황]
남성로는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 장관동, 수동, 계산동2가, 덕산동, 하서동, 서성로2가 등지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서성로, 남쪽으로는 대구 최대 동서 간선도로인 달구벌대로, 동쪽으로는 중구 중심도로인 중앙대로가 지나고 있어 접근성이 좋다.
남성로의 약전골목은 한국을 대표하는 약령시이다. 남성로 동쪽에는 염매시장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대구제일교회와 대구 구 교남YMCA회관이 있다. 대구제일교회는 1893년 설립된 대구 최초의 교회이다. 교회 건물은 1908년 건축되었으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6년 지금의 자리인 중구 동산동으로 이전하였다. 대구 구 교남YMCA회관은 국가등록문화재 제570호와 한국 기독교사적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남YMCA는 1921년 12월 창립되었다. 대구 구 교남YMCA회관은 1914년 미국의 블레어(H.E.Blair) 선교사가 건립한 2층 건물로 대구 근대 운동의 거점 및 관문 역할을 수행한 장소이다. 대구 구 교남YMCA회관은 3·1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신간회 운동의 거점 공간이었다. 두 건축물은 대구근대화골목 관광투어에 포함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