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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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城館 |
이칭/별칭 | 객사,경상감영 객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 5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조선 후기 대구에 설치된 경상감영의 객사.
[개설]
객사(客舍)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곳인 정당(正堂)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숙박하는 건물을 합친 시설을 말한다. 대구 경상감영 북서쪽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 일대에 지어졌던 객사는 중앙 건물인 달성관(達城館) 양옆으로 팔달헌과 대슬헌, 주흘헌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변천]
달성관은 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경상감영은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관할하던 조선시대 지방관청이었다. 1906년 당시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였던 박중양에 의한 대구읍성 철거 이후 경상감영의 객사였던 달성관은 일본인들에게 무상으로 넘어갔다. 일본인들은 달성관을 허물고 새로운 시가지를 만들고자 하였고, 대구 주민들은 모두 반발하고 나섰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일본 거류민단의 경상감영 객사 철거를 저지하자”고 쓴 방을 곳곳에 붙이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수백 명의 주민이 철야로 달성관을 지켰다. 당시 기생 염농산 등이 주민들과 합세하여 객사 앞에서 농성하기도 하였다. 농성을 하는 주민들이 해산하지 않자 일본인들은 대구에 주둔하던 자국군 수비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켜 달성관을 에워싼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1908년 달성관을 허물어 버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상북도관찰사는 달성관에서 초하루와 보름, 또는 나라에 큰일이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향망궐배(向望闕拜)[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를 하였다. 경상감영 객사인 달성관 일대에는 약재 시장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관찰사 임의백(任義伯)은 1658년(효종 9) 경상감영 객사 주변에서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약재 시장을 개설하였다. 이것이 대구 약령시의 시작이며 이후 약 250년간 객사 주변에서 약령시가 열렸다. 약령시는 봄에는 2월 3일부터 10일간 객사의 남쪽에서 열려 ‘춘령시(春令市)’ 또는 ‘남시(南市)’라고 하였고, 가을에는 10월 3일부터 10일간 객사 북쪽에서 열려 ‘추령시(秋令市)’ 또는 ‘북시(北市)’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