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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45
한자 大邱南山國債報償婦人會
이칭/별칭 대구남산동국채보상부인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7년 6월연표보기 -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결성
최초 설립지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지도보기
성격 애국계몽운동단체

[정의]

1907년 6월 대구광역시에서 국채보상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결성한 여성 단체.

[개설]

대한제국 시기 일본으로부터 빌려 쓴 1300만 원을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대구에서는 중구 남일동에서 1907년 2월 23일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婦人會)가 결성되었고, 1907년 6월에는 중구 남산동에서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大邱南山國債報償婦人會)가 결성되었다. 이외에도 국채보상탈환회가 결성되어 대구에는 무려 3개의 국채보상운동 여성단체가 결성되었다.

[설립 목적]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는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결성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회장은 서주원(徐周媛)이었고, 부회장은 구연승의 부인이었다. 서주원은 죽장(竹杖)을 짚고 짚신을 끌며 마을마다 찾아다니면서 부인들을 설득하여 부인들이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주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의 설립이 가능하였다.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는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이끌며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는 경제 구국운동을 대표하는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근대 여성운동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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