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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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運動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찬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 변화를 일으키거나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속적·집단적으로 전개하는 일체의 행동.
[개설]
사회 운동이 일정한 이념을 갖춘 항구적인 조직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 사회 성립 이후부터이다. 산업 사회에서 야기된 제반 모순에 저항하여 사회 개혁 내지 사회 개선을 도모하려는 근대적 사회 운동은 서구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전개되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대내적 모순과 외세 침략으로 발생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 운동이 일어나고 발전하였다. 하지만 지역의 사회 운동은 각 지역마다 갖고 있는 현안과 특성에 따라 다르게 일어났다.
청도의 사회 운동은 당시 사회적 상황과 청도 지역의 특성 및 현안에 따라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기술할 수 있다. 첫째는 민족 독립운동이며, 둘째는 지역 사회 개발 운동, 셋째는 현실 참여 운동이다, 민족 독립운동은 8·15 해방 이전에 있었던 항일 운동, 3·1 운동, 교육 운동과 청년 운동 등이 해당된다.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은 1970년대 주류 사회 운동으로 새마을 운동 등이 있다. 현실 참여 운동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사회 운동을 의미한다.
[민족 독립운동]
청도의 항일 운동은 한일 합방이란 미명 아래 국권을 왜적에게 빼앗겨 혹독한 압박과 수탈을 견뎌 내는 상황에서 군 내에서 또는 군 외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행해졌다. 항일 투쟁을 한 청도의 애국지사들은 수없이 많으나 문헌의 결핍과 고증의 불충분으로 상세하고 정확하게 수록하지 못한다. 청도의 3·1운동은 서울에서 3·1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목격하고 급거 귀향한 사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 대구 등지에서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군 내 각지에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투옥되고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청도의 독립운동은 대한 제국 시기 의병 운동과 계몽운동에서 시작되어 1941년 동진회 의거까지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다. 청도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대한 제국기의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 1910년대 국내외 항일 투쟁, 1919년 3·1운동, 1920년대의 민족 운동으로서 청년 운동·농민 운동·사회 운동·신간회 운동,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으로 동진회 의거 등이 있었다.
1. 대한 제국 시기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
대한 제국 시기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전개된 청도 지역의 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이다. 청도 지역은 1905년 이후 전개된 후기 의병에서 활동이 나타나고 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운문면 공암 출신의 의병장 윤만파(尹萬坡)와 각남면 일곡 출신의 의병장 최한룡(崔翰龍)이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청도 지역에서는 계몽 운동 단체 지방 지회인 대한 자강회 청도 지회와 운문면에서 조직된 운산 친목회(雲山親睦會)와 간친 교육회(懇親敎育會), 그리고 청도군 국채 보상 의연회(淸道郡國債報償義捐會)의 활동이 있었다.
신교육 구국 운동 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선각적인 유림에 의해 설립된 10개의 사립 학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다. 특히 1898년 3월 설립된 대성면 유천리의 유천 학교(楡川學校)와 1907년 11월 설립된 운문면 신원리의 문명 학교(文明學校)는 주목된다.
2. 1910년대 국내외 항일 운동
청도 출신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먼저 국내에서는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거부했던 유생 성기운(成璣運)과 김달(金達)이 있다. 1910년대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이정희(李庭禧)·홍주일(洪宙一)·김유덕(金裕德)·김유경(金裕經)·최태석(崔泰錫)·최태욱(崔泰旭) 등 선각적인 인사들의 활동도 주목된다. 한편, 국외 독립운동으로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했던 예대희(芮大禧)의 활동도 눈길을 끈다.
3·1 운동 이 발발하자 청도군 7개 지역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고, 파리 만국 평화 회담에 대한 독립 청원 운동도 있었다. 대성면 유호리 만세 시위 운동과 일본인 공격, 운문면의 만세 시위 운동과 일본 경찰 구타 의거는 평화적인 만세 시위가 일제의 탄압에 대응하여 무력 시위로 발전한 것이다. 유생 김정기(金定基)는 스승인 노상직의 뜻에 따라 동문들과 함께 유림의 독립 청원서에 서명하였다.
4. 1920년대 민족 운동
1920년대는 교육 운동, 농민 운동, 계몽 운동, 노동 운동, 여성 운동, 청년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에 이르고 이러한 흐름에 따라 각 지방에서 각종 청년 단체들이 우후준순처럼 조직되어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청도 지역에서 민족 운동으로서 사회 운동을 각 부문에 걸쳐 전개하였다.
국내 독립운동은 김유덕의 신민사(新民社), 이정희의 조선 독립 운동 후원 의용단, 홍재범(洪在範)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 및 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윤병권(尹炳權)의 제2차 유림단(儒林團) 군자금 모집, 김진효(金鎭孝)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다물단(多勿團)의 군자금 모집 등이 있다. 국외 독립운동으로는 윤치언(尹致彦)의 진주 청년 친목회, 김인제(金仁濟)의 길림성 군정서 부속 흥업단, 강수영(姜壽永)의 만주 독립운동 등이 주목된다.
청도인들은 국내에서 이들 단체와 관련을 맺고 군자금과 단원 모집 등을 펼쳤으며,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청도군 운문면 출신의 인사들이 북경에서 조직된 국민당 및 다물단과 연계하여 독립 군자금을 모집·제공한 혐의로 체포·송치된 다물단 사건이 주목된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 정치가 소위 문화 정치로 전환되었다. 이후 한국의 민족 운동은 문화주의적 민족 운동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어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이 크게 대두되었다. 청도의 교육 운동은 1906년 지금의 화양읍 교촌리에 있는 향교에서 도주 학원이 창시되어 1909년에 사립 청도 보통학교로 된 것이 시초이다. 1906년 지금의 금천면 신지리에 사립 신명 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12년에 사립 선암 보통학교로 되었다. 1908년에는 사립 문명 학교가 지금의 운문면 신원리에 설립되었다.
5. 1930년대 이후 민족 운동
1931년 청도면 고수동에서 일어난 군용 열차 전복 의거와 1943년 청도면 유호리에서 조직된 동진회(東進會)가 만주 독립운동 단체와 기맥을 통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구 사범 학교 비밀 결사 연구회와 다혁당(茶革黨)에 참여한 안강진·최태석·이종악 등의 활동도 주목된다. 1940년대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에 입대하였던 한일근·김해득·윤봉갑·손기달·김의명·박종락·박기수·반양환·김원진, 만주에서 통의부와 의군부, 조선 혁명군에 참여하였던 박대호와 박영호, 그리고 최운구 등의 활동도 있었다. 청도 지역에서는 1930년대 국민 총동원령에 대한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지역 사회 개발 운동]
해방 후 산업화·근대화의 시기에 청도의 대표적인 사회 운동은 지역 사회 개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새마을 운동이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은 청도읍 신도 1리가 발상지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직장과 시민 등 모든 분야 및 계층에 확산되고 침투되어 전개되면서 나라가 발전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청도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여 농촌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올려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로 명명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은 4 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다. 첫째, 기반 조성 단계[1971∼1973년]로 청도군은 환경 개선 기반을 다지기 위한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마을 진입로 정비, 마을 앞을 흐르는 소하천 정비, 농로 확장 등과 지붕 개량 사업을 중점 추진하였다. 이 운동을 통하여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점화시켰다. 둘째, 자조 발전 단계[1974∼1976년]로 농민의 소득 증대에 가장 역점을 두면서 증산 향상과 새마을 지도자의 교육을 통해 새로운 영농 기술의 개발과 보급으로 농가 소득이 획기적으로 증대되어 1974년 농가 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소득을 앞서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자립 구축 단계[1977∼1980년]로 이 기간은 새마을 운동에 대한 국민 의지를 결집케 하여 민간 주도 새마을 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다. 특히 자립 의지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시책으로 농산물 증산 운동, 생활의 근검 운동, 이웃을 위한 상호 인보 운동, 목적 의식의 정직 운동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나아가 농가 소득 증대 운동의 지속화와 새마을 정신 그리고 이념을 생활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넷째, 복지 정착 단계[1981∼ ]로 1970년대 희망을 주었던 새마을 운동은 1980년대 접어들어 새로운 도약기에 이른다. 그간 정부가 주도하여 추진되던 새마을 운동을 온 국민이 다함께 참여하는 진정한 국민운동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1980년 12월 1일 새마을 운동 중앙 본부가 발족되어 민간 주도 체제로 바뀌었다. 1982년 새마을 운동 경상북도 지부가 설치되었고 1984년 3월 새마을 운동 청도군 지부가 창립되었다.
[현실 참여 운동]
청도의 1980년대 이후 사회 운동은 당시 직면하고 있는 현안에 관련된 행위로 현실 참여 운동이라 한다. 사회 운동에는 지역 노동 운동, 지역 사회 운동, 지역 환경 운동이 있다. 지역 노동 운동은 노동의 공간적 분업에 따라 성격과 조직이 특징지어진다. 지역 사회 운동은 주거, 교육, 보건 의료, 교통 등의 생활 수단에 대한 요구의 운동이다. 지역 환경 운동은 자연환경의 파괴와 오염에 대한 대책 및 욕구의 운동이다. 청도의 경우 농촌이라는 특성으로 지역 노동 운동의 기술에 한계가 따른다.
지역 사회 운동으로는 2008년 청도군 축산 연합회에서 개최한 광우병 수입 저지를 위한 촛불 문화제가 있다. 청도군청 옆 복개천 광장에서 축산 연합회 회원 가족 및 주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하여 수입 소 반대 시위와 함께 자유 발언대 등을 통해 축제를 겸한 사회 운동이 개최되었다.
지역 환경 운동 중 1980년대 이후 청도 지역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일부 단체명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계몽 운동 단체로 1980년에 바르게 살기 운동 협의회, 1995년에 생활 개선 연합회, 2009년에 청도 사랑 군민 연대가 설립되었다. 환경 보호 단체로 1996년에 청도 자연 사랑 연합이 설립되었다. 이들은 각각 청도 계몽 운동과 관련된 사회 운동을 펼쳤으며, 청도군청 주도로 2007년 문화재를 아끼고 보존하기 위한 문화재 가꾸기의 날을 제정하여 사회 운동이 펼쳐졌다.
한편 2007년 클린 경북 만들기 실천 대회가 창립되었다. 2008년 다시 찾고 싶은 클린 경북 만들기 실천 대회가 4월 11일 청도군 청도천 둔치에서 펼쳐졌다. 대회는 경상북도 내 23개 시군 새마을 운동 지부, 자연보호 협의회, 바르게 살기 운동 협의회, 자원봉사 단체 등 4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사회봉사 단체로 1981년 로타리 클럽, 2003년 자원 봉사 센터가 설치되었다. 시민운동 단체로 2011년 한 자녀 더 갖기 운동이 출범하였다. 이외 청도군 다문화 지원 센터에서 진행하는 사회 적응을 위한 한국어 교실, 다문화 가족 생활 교육, 취업 연계 및 훈련, 다문화 가정 언어 발달 방문 사업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청도의 사회 운동은 계몽 운동, 환경 운동, 봉사 운동, 시민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최근 사회 운동의 경향인 현실성과 참여성 및 적극성을 보임으로써, 향후 청도 지역의 현안을 조정하고 해결하며 감시하는 데 기여하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