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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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慶胤 |
이칭/별칭 | 효중,국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출생 시기/일시 | 1555년 - 박경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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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박경윤 무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26년 - 박경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16년 - 박경윤 병조 판서 증직 |
출생지 | 박경윤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
사당|배향지 | 숭의사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
묘소|단소 | 박경윤 묘소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동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병조 판서 |
[정의]
조선 후기 청도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효중(孝仲), 호는 국헌(菊軒). 할아버지는 박하담(朴河淡), 아버지는 장사랑 박이(朴頤), 어머니는 만호 예신충(芮信忠)의 딸 의흥 예씨(義興芮氏)이다. 제우당 박경전(朴慶傳)의 아우이다. 부인은 장사랑 김응권(金應權)의 딸 경주 김씨이다. 아들이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된 첨정 박린(朴璘)이다.
[활동 상황]
박경윤(朴慶胤)[1555∼1626]은 임진왜란 때 청도 박씨 문중의 일원인 형·조카들과 더불어 창의하여 아익장(亞翼將)으로 공을 세워 청도를 침입했던 왜적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벼슬이 봉사에 이르렀다.
그 후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에 제수되었다. 무예로 사적(仕籍)에 올랐으나, 문필로 스스로를 즐겨 선암사 곁에 퇴거하여 시를 짓고 살았다. 형 박경전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예부운략(禮部韻略)』의 판본을 복각하여 공전(公傳)하게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가 되었고, 후에 도신(道臣)의 계문으로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동 독방산(獨防山)에 안치되었다.
[상훈과 추모]
1816년 어사의 계달로 형인 박경전과 함께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1901년에 창건한 종사(宗舍)인 입암재(立巖齋)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다. 청도군 이서면 숭의사(崇義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