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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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895년에서 1911년 사이 경상북도 청도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의병의 역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양란 의병과 대한 제국기의 의병이다. 대한 제국 시기 의병은 1895년부터 1896년까지의 제1차 의병 전쟁[전기 의병, 을미의병]과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제2차 의병 전쟁[후기 의병,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의병 전쟁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 안동부 관할의 14개 군현에서 양반 유생들이 창의하였으며, 그 외 김산·진주 등지에서도 창의하였다. 제2차 의병 전쟁은 러일 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응하여 1905년 9월부터 삼남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1906년 민종식 홍주 의진, 영천의 정환직(鄭煥直)·정용기(鄭鏞基) 부자의 삼남 의진(山南義陣), 영해 신돌석의 영릉 의진 등이 창의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경기도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청도 지역에서는 1906년 3월 창의하여 활동하였던 산남 의진에 참여한 박용운(朴龍雲)·박문선(朴文善) 등이 청도·창녕 일원에서 활동했던 경우가 있고, 1907년 7월경 창의하였던 최한룡(崔翰龍)과 1908년 청도 운문면 일원에서 활동했던 윤만파(尹萬坡)의 활동이 주목된다.
[청도군의 의병 운동]
청도 유림의 의병 항쟁은 진계(進溪) 박재형(朴在馨)에게서 처음 시작되었다. 박재형은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黙)의 아들이다. 박시묵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영남 소모사(嶺南召募使)로 파견된 이종상(李鍾祥)으로부터 청도 지역의 의병 소모책(召募責)을 위촉받았다. 박시묵은 정재 류치명의 제자로 위정척사 사상으로 충만된 통문을 각 문중에 보내 창의를 호소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박재형은 1900년 8월 12일 의병으로 출전하여 거제군(巨濟郡) 부인포(夫人浦) 해상에서 순국하였다고 한다. 청도 출신의 유생으로는 처음 의병에 참가한 경우이지만, 박재형의 의병 활동은 그 실체가 분명치 않다.
1895년 을미의병에서 청도 유림의 창의는 없었으나 1905년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면서 청도 지역에서도 의병 항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남 의진은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경북 영천·영덕·청송군 일대에서 정용기·정환직·최세윤(崔世允) 의병장이 이끌던 의병진이다. 창의장 정용기가 1907년 10월 입암 전투(立巖戰鬪)에서 전사한 뒤, 동년 12월 제2대 대장 정환직마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최세윤은 1908년 2월 5일 이세기(李世紀)·정순기(鄭純基) 등에 의해 산남 의진의 제3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1908년 1월부터 영천을 비롯하여 청송·영덕·영양·영해·경주·청도·의성 등지에서 각 지대별 유격전을 구사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 중 경산·청도 지역에는 지역 분대(地域分隊)가 설치되었는데, 운문산(雲門山)이 그 본거지였다.
대체로 청도 지역에서는 의병장 최한룡, 의병장 윤만파, 경산 출신의 의병장 권병호(權炳瑚), 산남 의진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군장 박용운(朴龍雲) 등이 이끄는 소규모 의병 부대가 운문면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의병장 최한룡은 1907년 7월경 청도군 각남면(角南面) 일곡리(日谷里) 출신의 양반 유생이었다. 최한룡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국권 회복을 모색하던 중 1906년 산남 의진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 회복을 부르짖는 다섯 차례의 격문(檄文)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1907년 7월경에는 부하 70여 명으로 의병 부대를 결성하고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윤만파와 권병호가 거느린 의병 부대는 1908년 4월경 청도군 운문면을 중심으로 경주·울산·경산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윤만파가 거느리고 있던 의병 부대에는 중군장 권달오(權達五)·소모장 구성립(具成立)·유진삼(兪進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권병호가 거느린 의병 부대에는 손석태(孫錫泰)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4월 9일 대구 경찰서에서 파견된 제일변장대에 의해 구성립을 비롯한 권병호와 손석태, 그리고 유진삼 등이 체포되었다.
의병장 윤만파는 1908년 4월 3일 경 경주군 산내면에서 창의하였으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흩어졌다. 그 후 경주군 산내면 일원에서 청도 출신의 소모장 구성립과 밀양 출신의 종사 유진삼 등 의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다. 이들은 4월 8일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울산군 두서면(斗西面)에서 총기 7정을 약탈하여 경주군 산내면 산저리(山底里)에 은닉하였다. 또 4월 9일에는 소모장 구성립이 공암리 윤감찰(尹監察)에게 군수전 500량의 출금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1908년 경산군 남면[현 남천면] 신석리의 창의 대장 권병호가 경산·청도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권병호는 1908년 1월 전라남도 장성군 용강사(龍江寺)에서 창의하여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일본 순사 4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거창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이산하여 각처를 전전하였다. 1908년경 권병호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잠복하고 있었다. 권병호는 4월 초에는 동이위면(東二位面)[현 운문면] 공암리(孔巖里)에서 사방으로 격문을 발하며 재기를 도모하였다.
[역사적 의의]
청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은 대부분 초기에 진압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주변 다른 지역의 의병 진영에 참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비록 청도 지역에서 창의하였더라도 소규모로 편성된 의병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청도 지역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한 매일 신보(大韓每日申報)』에서 볼 수 있듯이 청도 주변의 경주·언양·경산 등지에서 의병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1908년 2월 청도군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퇴각하자 의병 탄압을 위해 들어온 일본군의 약탈과 부녀자 겁탈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