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20 |
---|---|
한자 | 丙子胡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발생한 전쟁.
[개설]
병자호란 은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만주족 후금(後金)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을 침략하여 발생한 전쟁이다. 병자호란 중에 청도에서도 의병이 모집되고 근왕병(勤王兵)들이 힘을 합하여 청과 맞서 싸웠다.
[역사적 배경]
광해군(光海君)의 중립 외교 대응 후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는 후금을 배척하고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론에 집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팽창 정책을 쓰던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에 인조(仁祖)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삼남 지역에서 출정한 근왕병들이 경기도 광주 지역으로 집결하면서 전쟁이 전개되었다.
[경과]
후금 태종(太宗)이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청이라 고친 후 1636년 12월 8일 10만 대군으로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여의치가 않아 소현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그러자 각지의 근왕병들이 경기도 광주 쪽으로 집결하였고, 각 지역 단위로 의병들 또한 창의의 깃발을 올리며 집결하였다.
이에 청도 출신의 박린(朴璘)은 62세의 노령에도 경상도 의병진에 가담하여 청군과 맞서 싸웠다. 이장(李王將)과 이하(李瑕) 형제 역시 1637년(인조 15) 1월에 의병진에 가담하여 청나라 군사와 대적하다 전사하여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한편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낸 청도 출신 박우(朴瑀)[1576∼1637]는 영남 근왕병 일원으로 광주 쌍령 전투(雙嶺戰鬪)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결과]
전쟁의 여파는 다방면으로 나타났지만, 특히 향촌 사회 질서가 재편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전쟁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포상의 은전을 내렸으니, 박우는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고, 이장은 군자감 정으로 증직되었으며, 후일 박린은 청도 숭절사에 배향되었다. 이렇듯 포상의 은전을 받은 가문들이 조선 후기 청도 향권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병자호란 당시 청도에서 직접적인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 출신 문무 관인들과 향유들이 스스로 일어나 외적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청도 지역 향촌 지배 질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