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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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雲門山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발생|시작 장소 | 운문산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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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박경전 |
[정의]
임진왜란 당시 경상북도 청도 운문산 일대에서 의병들이 왜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개설]
운문산 전투 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당시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조직된 의병들이 왜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침입한 왜군 중 제1군은 4월 14일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이 버틴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이어 김해·양산·울산·언양까지 파죽지세로 올라왔다. 그리하여 4월 18일에는 밀양을 함락되고, 4월 20일에는 청도까지 점령하였다. 왜적의 제1군 본대가 휩쓸고 지나간 청도는 바로 좌우측에 자인·경주와 창녕을 목표로 한 제2군과 제3군이 북상하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전쟁 초기부터 피해가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4월 20일 군수 배응경(裵應褧)이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睟)와 대구와 청도 경계에 위치한 최정산(最頂山)으로 미리 피해 버렸기 때문에 청도읍성이 적의 수중에 손쉽게 넘어갔다. 임진왜란 직전에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수축한 읍성과 산성들이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점령당하고 만 것이다.
[경과]
이후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이 매우 커지면서 전선이 중로(中路)를 중심으로 형성되자 청도 지역은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위기에 직면한 청도에서는 양반 사족들이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즉, 밀양에서 올라오던 왜군은 물론 인근 자인·경주 쪽에서 넘어온 왜군을 상대로 청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1594년 10월 25일경 울산 언양에 머물던 왜군의 탐정병 10여 명이 가슬(嘉瑟) 고개를 넘어 운문사에 들어와 비를 부수고 절을 불태웠다. 이들은 공암(孔巖) 규석문(窺石門)에 이르러 의병들과 마주쳤다.
청도 운문산 지역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린 의병장 박경전(朴慶傳)[1553∼1623]의 부대가 운문사에 침입한 왜군을 추격하여 모두 소탕하였다. 이후 운문산을 넘나드는 왜군이 없어 농민들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청도는 왜군의 제1군 본대가 휩쓸고 간 지역인 동시에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이 주어져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밀양 박씨(密陽朴氏) 문중의 14명의 의사(義士)를 비롯한 여러 의병들이 활약하여 왜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힘으로써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시 청도 지역 의병 활동에 대한 상반된 자료들이 현존하고 있고, 운문산 전투 역시 이들과 결부되어 논란의 여지는 있다.